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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9.08.31 무너진 터널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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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19.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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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LDK의 방은 다른 사람이 빈번히 찾아올 것을 상정하지 않고 선택되었다. 오오하타케 시로 거처를 옮길 무렵 스물세 살이었던 카즈키는 스물여덟의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몰랐다. 소파에 누운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면, 베란다로 이어지는 창문을 덮은 커튼이 보였다. 안경을 벗어둔 시야는 흐리게 번져있지만 눈을 감은 채로도 난간 너머로 보일 오오하타케 시를 떠올릴 수 있었다. 지루하고 틀에 박힌 모습으로 떼지은 아파트. 그 뒤로 느리게 돌아가는 관람차와 놀이공원의 불빛. 한때는 다닥다닥 붙은 창문에 장난감 버튼처럼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이 조용한 세계에선 아니었다. 그 너머에 어떤 풍경이 있든 카즈키의 눈에 실제로 보이는 것은 새벽의 어둠에 축축하게 가라앉은 커튼뿐이다. 이른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커튼 아래로 스미는 걸 보고있으면, 찰칵. 현관의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어 돌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손님을 반기는 대신 카즈키는 몸을 돌려 소파 등받이 쪽으로 고개를 향하고 자는 척 눈을 감았다.

 신발을 벗고 현관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은 거실에서 자고있는 카즈키를 발견했는지 조용히 부엌으로 걸음을 돌린다. 가차없이 부스럭거리는 비닐봉지조차 그의 주의깊은 노력 끝에 얌전히 식탁에 안착했다. 냉장고가 열리고, 몇 가지 재료는 밖에서 안으로, 또 안에서 밖으로 자리를 바꾸는 듯하다. 싱크대를 두드리는 물소리에 이어서 채소의 겉껍질을 벗겨내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끼리 마찰하는 것처럼 삭, 삭, 하고 얇은 소리가 귀에 스몄다. 자신의 방에 어울리지 않는 화음을 카즈키는 말없이 듣고 있다. 이미 오래 반복된 일이지만 그는 아직도 그것을 낯선 소리라고 생각했다. 눈을 감은 채 목탁처럼 칼과 도마가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있으면 느리게 졸음이 몰려왔다. 자는 척 하다가 진짜 잠드는 건 다섯 살짜리 애들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런 말로 스스로를 우습게 여겨봐도 이미 몸이 무겁다. 오래된 형광등처럼 의식이 깜빡이는 순간이 몇 번 지나가는 사이, 익숙한 카레의 냄새가 좁은 집안으로 퍼져나간다. 해가 뜨고 있다. 커튼을 통과한 빛이 소파를 덮어가기 시작한다. 발소리가 거실을 향해 다가왔다. 

 "유게 씨, 일어나세요."

 카즈키가 느리게 눈을 뜬다. 아침이었다.

 

 

 

 

 

 

 

 





 "저번보다 약간 더 맵게 해봤어요. 좀 많이 매운가 싶기도 한데……. 어떠세요?"

 숟가락에 담긴 카레는 평소보다 붉은빛이 돌았다. 커튼은 요타카의 손에 걷혀졌고, 완연한 아침의 빛은 사양않고 창문을 통과해 거실을, 그로부터 일직선으로 이어진 부엌을 비췄다. 카즈키는 카레를 한 입 먹어보고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맛있네."
 "이 정도가 좋으신가요?"
 "뭐…….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데, 매운 건 그냥 저번이랑 비슷하게 해."
 "왜죠. 마음에 드시면 그냥 이대로 만들어드릴게요."
 "내 마음이야."

 그렇게 말하면 요타카는 별로 납득하지 못한 표정으로 다음 한 입을 먹는다. 그의 입맛에는 카레가 꽤 매웠는지 가끔 가다가 찬 물이 든 물컵을 입에 댔다. 카즈키가 덧붙인다. "쓸데없는 눈치 싸움 하지 말고 내 말대로 만들어." "셰프는 전데." "고용주는 나지." 접시 가장자리에 담긴 후쿠진즈케(*福神漬 자른 무와 야채를 조미액에 절여만든 절임. 흔히 카레에 곁들여 먹는다.)는 적당히 달고 아삭했다. 직접 담갔다는 절임의 레시피를 요타카가 어디의 누구에게서 배웠다고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허름한 자취방에서 낭비되는 솜씨를 카즈키는 내심 불쌍히 여겨왔지만 아직 그 말을 요타카에게 전한 적은 없다.

 "너무 일찍 오지 말고."
 "그렇게 일찍 안 왔어요."
 "새벽에 왔잖아."
 "그건…… 어제 일찍 잠들어서. 그리고 마히루도 아직 안 일어나서요…… 그때 깨셨어요?"
 "처음부터 안 잤어."
 "아까 주무시고 계셨으면서."
 "자는 척이었거든."
 "네……."

 카즈키의 시시하고 이유없는 거짓말을 요타카는 익숙하게 넘긴다. 흉터가 빼곡한 손이 숟가락을 쥔 채 카레를 뜬다. 스물을 넘겼다고 하는 카시라타카 요타카의 얼굴에는 언제까지고 벗겨지지 않을 앳된 티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 둥근 윤곽은 식사의 장면을 이루는 사소한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열아홉과 스물을 가르는 선은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그 선이 이름을 기억된 사람들에게까지 크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너 카레 좋아하냐." "네? ……네, 좋아해요?" 호불호에 대해 물으면 요타카는 늘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 그러니 말의 진위 여부를 가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카즈키는 더 묻지 않고 마저 식사를 한다. 아침의 눈부신 햇살이 요타카의 옆얼굴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카즈키의 입맛에 맞춰진 카레는 내일까지 먹을 수 있을 만큼 냄비 안에 남아있다.

 어떤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에는 규격이 정해져있다. 어울리지 않는 말은 잘못된 말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에겐 언제나 구실이 필요했다. "네가 워낙에 꽉 막힌 녀석이라 말하는 건데."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멎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게 계속되는 식사의 틈으로, 카즈키가 식탁 옆쪽에 놓인 물병을 집어들었다. 반밖에 비지 않은 컵 안으로 물이 채워진다.

 

 "요리는 가끔만 해도 되니까 그냥 심심할 때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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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utiful city

2021. 1. 16. 21:33 from 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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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원 벤치에서 카즈키가 느리게 눈을 떴을 때, 곁에는 이츠키가 앉아있었다. 어디도 손상되지 않고 말끔한 모습의 동생이 카즈키를 본다. 모자의 그림자 아래에 숨어 자는 척 눈을 감았다. 시선은 거둬지지 않은 채 계속 카즈키의 얼굴에 머무른다. 이미 눈치 챈 게 분명했다. 최악의 아침이군. 잠이 덜 깬 것처럼 멍한 머리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여기 있어?" 카즈키가 그렇게 물으면,

 "그게 첫 마디야?" 이츠키가 어이없다는 듯 그렇게 대답한다. 

 

 죽인 사람과 죽은 사람의 재회가 이렇게 빠른 건 뭔가의 법칙에 위배되진 않나. 그런 항의를 하기엔 이곳은 이미 거짓말 같은 도시다. 남색의 하늘. 무너지지 않은 건물들. 죽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듯 모든 것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오오하타케 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도시는 이런 모습이었던가. 5년의 기억이 거짓말처럼 낯선 풍경으로 다가온다. 카즈키는 자세를 일으킨다. 

 

 "그 꼴이 나고도 날 기다릴 기분이 들다니 비위가 대단하네…….”

 "솔직히 말해줘? 지금 형 얼굴 보기 좀 싫어."

 "……눈이라도 감든지."

 "그래봤자 소용 없잖아."

 “왜 소용이 없어.”

 "그래서, 이긴 거지?"

 "응."

 "역시 세상을 지배하는 건 게임인가…… 나도 게임이나 할걸."

 "넌 앞으로 20년동안 게임만 해도 나 못 이겼어."

 "괜히 기다렸네. 만나자마자 이런 소리나 듣고."

 

 그리고 대화가 끊긴다. 부자연스러운 정적이다. 답안을 끼워넣어야 하는 공란처럼. 이곳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 것만 같다. 영원히 밤일 것 같고, 아무리 사람이 늘어도 쓸쓸할 것 같다. 여생이라는 말을 쓰기에도 이상한 유예의 시간을 파일럿들은 이곳에서 보내야 한다. 아무래도 말을 해야 하는 게 자기쪽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카즈키는 중얼거리듯 말한다.

 

 "가도 돼."

 

 어쩌면 28년 동안 하고 싶었던 짧고 시시한 말. 

 

 "또 마주칠지도 모르지만. 모른 척 해도 되고."

 

 작은 케이지 같은 하나의 도시는 그래도 사람 한 두 명이 마주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는 넓다. 그도 그럴게 이곳의 파일럿들을 2주 전에야 처음으로 알게 되지 않았는가. 그 짧은 기간동안 알게 된 정보량은 이례적이었지만 이제 그럴 필요도 없었다. 영영 엮일 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인사를 한 번 했던가. 그건 나쁘지 않은 인사였다. 노력의 여지도 있었다. 이츠키는 카즈키를 가만히 본다.

 

 "그냥 왔다갔다 할게."

 "……그거 지금 내 말에 대한 답이야?"

 "응. 폼 잡는 거 보니까 왠지 짜증나서."

 "다들 너 보고 착하다는데 너도 어지간한 거 알지."

 "형한테만 그래. 다른 사람들한텐 잘 할 거야."

 

 "다들 좋은 사람 같아보이더라…… 우리 진짜 나쁜 짓 한 거야. 알지." 동생이 그렇게 말하면 카즈키는 대답하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가 여전히 스마트폰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스마트폰을 꺼내면 간편하게 시선을 둘 곳이 마련된다. 검은 화면에 카즈키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알 게 뭐야. 세상도 구해줬는데 감사는 못할 망정." "그런 말 절대로 하지 말고." 유감스럽게도 카즈키는 제법 진심이지만, 그런 말이 통하지 않으리란 예감은 있다. 기울어진 안경 너머로 상처 받은 얼굴들을 본 기억이 남아있었다. 이런 건 다른 세계로 보낼 때 서비스로 지워줘도 되지 않나. 그러나 모니터에게 그런 복지까지 받는 건 그것대로 자존심이 상했다. 시시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동안 이츠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고?"

 "응. 지낼 집은 형이 찾아둬. 여기 지리는 모르니까."

 

 몸에 시동을 걸듯 이츠키가 기지개를 켜면 기모노의 소맷자락이 흘러내린다. 그는 곧 저 너머에 두고 온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잃어야만 했던 것들의 가치가 머릿속에 불이 켜지듯 차차 쌓일 것이다. 살해당한 본인도 자신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의 몫까지 용서할 수는 없다. 

 

 “나중에 봐. 연락할 테니까."

 

 그래도 이츠키는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옮긴다. 카즈키는 익숙한 벤치 위에 혼자 남는다. 언제나 이 위에 있던 가로등 불빛은 위태롭게 깜빡거렸는데, 지금은 고쳐진 것처럼 잔잔했다. 화 내고 있었지, 다들. 마주치면 한 대 치기라도 하려나. 심볼 인카운터형 게임이 따로 없다고 생각하며 카즈키는 거기서 미적미적 시간을 흘려보낸다. 말하자면 욕 먹을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어차피 그에겐 익숙한 일이다. 스마트폰도 보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앞에 놓인 풍경을 보던 카즈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대로 낯선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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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오하타케 시에 주민 등록을 한 지 5년 가까이 되었지만 시립 도서관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그 탓에 도서관 카드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반납은 2주 후까지 부탁드려요. 따로 예약이 없으면 한 번까지 인터넷으로 연장 가능하세요.' 직원이 친절한 미소와 함께 〈호돌이의 모험〉을 카즈키의 손에 돌려주었다. 오래 들고 있고 싶은 책은 아니었기 때문에 카즈키는 지체 없이 도서관을 나왔다. 이런 걸 읽어줄 나이면 몇 살일까. 다섯 살? 여섯 살쯤? 카즈키는 다섯 살짜리 어린 아이가 얼만한지도 모른다. 다만 침대에 얌전히 누워있는 아주 어린 마히루를 상상해볼 뿐이다. 잠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작은 조명을 켜둔 아이의 방.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천천히 문장을 읊는 장면을.

 

 "안에 편지가 있는데 주소가 여기길래요."

 

 현관문이 열리고 책을 받아 든 건 여자였다. 슬픔으로 탈진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마히루가 봤다면 바로 울먹였으리라. 여자의 손이 카즈키가 서있는 것도 잊고 책을 펼쳐본다. 눈에 보일 만큼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잠시…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괜찮으시다면…."

 

 그들은 편지를 펼치기 전에 먼저 카즈키가 마실 차를 내올 정도로 예의 바른 부부였다. 딱 세 사람이 살기에 욕심부리지 않은 크기의 거실에서는 녹차 향이 가려질 만큼 진한 향 냄새가 났다. 남자와 여자는 한참을 울었다. 카즈키에게 사과하면서도 울었고, 마히루에게 사과하면서도 울었다. 조금 진정이 되었을 쯤에 남자는 이 책을 어릴 때 딸에게 자주 읽어주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딸이 얼마 전에 죽었다는 말도. 카즈키는 그저 가만히 그 말을 들었다. 그들이 죽은 딸의 편지라고 믿고 있는 것은 마히루의 작문 숙제를 보며 적당히 따라 그린 카즈키의 글씨였다.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고른 것도 마히루가 아니다. 그래도 그들은 그 종이 위에 담긴 게 딸의 문장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죄송합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

 "아닙니다. 괜찮으시면 향을 올려도 될까요."

 "…그래주신다면 감사해요."

 

 카즈키는 불단 앞으로 가서 가만히 무릎을 꿇는다. 불단에는 마히루의 사진이 올려져 있다. 아직 어색해 보이는 교복 차림에 꽃다발을 든 모습. 긴장한 얼굴이지만 카메라 너머의 누군가를 향한 신뢰가 어려있었다. 그들과 첫 시작의 기쁨을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 양초가 켜져 있었기 때문에 카즈키는 향을 하나 집어 불꽃에 선향의 끝을 대었다. 반쯤 재가 되어 기울어진 두 개의 향 옆에 새로 타들어가는 향이 세워졌다. 선향의 연기는 죽은 사람의 양식이 되고 산 사람의 마음을 부처에게 전한다고도 한다. 그 애의 영혼이 묶여있는 곳을 안다고 카즈키는 말하지 않는다. 그가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로 돌아와 찻잔을 비우고, 몇 마디 더 마히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에 시계를 확인했다.

 

 "죄송하지만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차, 감사드려요. …몸 조심하시고."

 "가시는군요. …저희야말로 감사합니다. 전해주셔서."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편지를 놓지 않았다.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는 부부에게 카즈키도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집을 나왔다. 점퍼에 향 냄새가 배어있었다. '아예 절 잊어버리셔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를 기억하는 게 아이다 부부가 아니라 카즈키여서 다행이었다. 

 

 

 

 

 

 

#2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연락처를 몰라서."

 "아뇨… 괜찮습니다. 전해주실 물건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케다 히로시의 새 아버지는 아이다의 부모와는 다른 방향으로 피곤해보였다. 장례와 수술. 어떤 의미로든 예민해질만한 시기였다. 그러나 아이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에게는 한 고비를 넘긴 사람의 안도가 보였다. 카즈키는 슈이치에게 부탁받은 것을 꺼내 남자에게 보여준다. 남자는 조용히 사진을 보았다. 그게 어떤 의미를 갖는 물건인지 이해한 표정이었다. 사진을 받아드는 대신 남자는 병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저는 잠깐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군요. 이야기가 끝나면 불러주세요…."

 

 카즈키는 홀로 병실 안으로 들어간다. 이미 갑작스러운 방문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졌는지 히로시는 카즈키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수술을 받은 지 며칠 지나지 않은 몸이 피곤한지 가만히 누운 채로 카즈키를 올려다본다. 그 까만 눈 안에 들어있는 슬픔과 기대가 부담스러웠다. 

 

 "…아빠랑 아는 사이세요?"

 "응."

 

 자리에 앉지 않은 채로, 카즈키는 들고 있던 사진을 이불 위에 내려둔다. 닿으면 사라질 물건에 손을 대는 것처럼 어린 손이 조심스레 사진을 집어든다. 놀라움이 지나가는 듯했던 까만 눈은 울 것처럼 일그러지면서도 울지 않는다. 아무런 기대 없는 동작으로 사진을 뒤집을 때까지는 그랬다. 아이가 울기 시작했을 때, 카즈키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여행이라고 부르는 건 고등학생에게 통할 만한 수법이 아니었다. 슬픔이 작은 몸 안에 다 담기지 않아 그 애는 이불을 그러쥐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진만은 구겨지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빠가… 제 이야기 가끔 했어요?"

 "자주 했어."

 "무슨 이야기?"

 "…그냥. 너 보고 싶다고."

 

 "그럼 보러 오지." 울먹이면서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카즈키는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어차피 해줄 수 있는 말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는 명함 하나를 마저 이불 위에 내려두었다. 아이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간다. 

 

 "퇴원하면 여기나 가보든지. 너희 아빠랑 갔던 데야. 맛 괜찮더라…. 비싸니까 생일이나 특별한 날에 가자고 해."

 

 명함에는 레스토랑의 주소가 적혀 있다.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 날 명함을 챙겨갔더라면 두 번 가는 수고는 없었을 것이다. 카시라타카의 몫까지 사느라 지출도 꽤 있었다. 역시 받은 것보다는 준 게 많다. 빚이라고 불러봤자 값은 받아낼 수 없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으니까. 카즈키는 빨갛게 부은 눈으로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가볼게요." 병실의 공기를 마시며 죽음을 생각하고 큰 아이들은 이런 표정을 짓는 걸까. 카즈키는 떠날 준비를 한다. 아이와 아빠, 둘만의 시간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3

 

 

 '행복을 빌며, 시라유키 마나코….'

 

 병실 안에 두 사람 중 누구의 것도 아닌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여자는 아직 여러 개의 관을 팔에 꽂고 있었다. 소리를 완전히 끈 TV에서 아나운서들이 입을 벙긋이며 오오하타케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랫동안 말한 적 없는 목은 끊어질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가만히 말했다. 

 

 "쥰의 목소리를 닮았네요…."

 "그 사람 목소리니까요."

 "…하지만 시라유키 마나코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요."

 "당신이 깨길 기다린다고 지은 가명이랬나그쪽이 백설 공주… 를 닮았다고. ."

 

 한숨을 쉬고 싶은 걸 카즈키는 간신히 참아낸다. 이런 낯간지러운 순간까지 견딜 각오를 하고 온 건 아니었다. 여자는 소리 내서 작게 웃었고, 어느 순간부턴가는 웃음과 흐느낌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여자의 울음 소리가 잦아들 때쯤에야 카즈키가 조용히 말한다. "녹음 파일은 보내드릴게요." "네, 감사드려요…." 여자의 연락처로 파일을 전송한 카즈키가 짧게 그녀의 이름과 사진을 바라본다. 아키. 마나코가 그녀를 그렇게 부르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만 움직여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는 사이에 6월이 벌써 지나버렸네요. 몇 번이나…."

 

 아마 누워있는 여자보다는 곁에 서있는 카즈키에게 바깥의 풍경이 더 잘 보일 것이다. 이제 여름보다는 가을에 가까운 날씨였다. 푸르렀던 것들이 나무에서 떨어져 바닥에 쌓이는 계절이 온다. 6월이 두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카즈키는 모른다. 앨범 안에 담긴 사진도. 그들의 추억도. "나가면 저도 사진을 찍어야겠죠… 아직 앨범이 완성되지 않았으니까." 그 말에도 카즈키가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여자는 이미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이제 몸이 따라주기만을 기다릴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그 사람 이름이나 물어봐도 될까요. 아직 가명밖에 몰라서."

 

 카즈키의 말에 여자는 창밖을 보면서도 가만히 손끝으로 앨범의 표지를 쓸었다. 옆얼굴로 보이는 여자의 눈이 그리움으로 가늘어진다. 그녀는 소중한 것을 꺼내놓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키리시마 쥰이에요."

 

 

 

 

 

 

#

 

 

 병원을 나서면서 카즈키는 사람들의 연락처를 지운다. 그들 중 누구에게도, 빈말로라도 다시 오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들에게 하는 선행은 쉬운 일이었다. 유품과 유언을 전해주고, 감사 인사를 받고, 불편한 분위기를 감내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거짓말을 하고…. 그들은 카즈키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리라.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상관 없이 유게 카즈키라는 사람은 이미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다. 죽은 사람을 대하는 것도 산 사람을 대하는 것도 피곤했다.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는 바라지 않는 일들을 해야 할 때도 있다는 지루한 격언을 기억했다. 남은 파일럿은 열 명이었다. 이제 정말 두 손 안에 들어오는 숫자다. 선행을 한다고 천국에서 사다리가 내려오지 않고,

 

 '빨리 끝나버렸으면….'

 

 그런 생각을 한다고 벼락이 내리지도 않는다. 시간은 여전히 지루하고 조급하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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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2020. 3. 5. 15:40 from 카테고리 없음

 

 

 

 

 "잠이 안 와요~ 우리 춤추면 안돼요?” 
 “여기서 추면 배가 뒤집어질 테니까 참아 줘, 카시."

 "…."

 "이야기라도 할까?" 

 "음.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왕자님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죠!" 
 "내가 하는 거야? 자, 잠깐 생각 좀 해보고."

 

 접어둔 닻의 끝자락이 잔잔한 바람에 간간이 팔락였다. 두 사람은 천 두 장을 하나는 나무 위에 깔고, 하나는 나눠 덮은 채 좁은 배 안에 누워 있었다. 물고기 한 마리 보이지 않는 물 위에선   노를 놓고 쉴 때마다 카시는 살아있는 생물이 없나 물 너머를 들여다봤고, 모모는 카시가 빠질까 봐 그 뒷모습을 꾸준히 감시해야 했다   바람에 수면이 찰박이며 만드는 심심한 리듬밖에 들리지 않았다. 고요하고 이상한 기분이 드는 밤. 바다 위에서의 첫 밤이었다. 

 

 피아칸트를 벗어나 록차를 타고, 걷고, 리탄트의 끝에 다다랐을 때 마침내 두 사람은 진짜 바다를 눈 앞에 두었다. 긴 여정이었다. 왕자와 귀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덧대어 입었던 천은 유용한 자금으로 변했다. 얇고 손에 부드럽게 감기는 천을 내밀고 풀 껍질에서 뽑은 실로 짠 빳빳한 천을 사들였을 때, 상인의 표정 아래로 흐르던 당혹을 두 사람은 가끔 유쾌한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어쨌든 그녀는 수완이 좋은 상인이었다. 몇 가지 장신구를 더 팔았을 때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는지 가죽 수통과 식탁에 오르는 것보다 한참 질기고 단단해보이는 빵을 보여주었다. 품이 안좋은 것이 아니라 잘 상하지 않게 구웠다는 설명을 덧붙여가며 말이다. 둘은 권유받은 대로 수통과 빵, 거기에 더해 말린 고기와 열매를 샀다. 짐은 토록 가죽으로 만든 가방 두 개에 전부 들어갔다. 나머지 돈은 배를 사는데 써야 했다.

 

 배. 그렇다. 우리는 정말로 배에 올라타게 되는 것이다. 옥상에 나란히 서서 왕성을 둘러싼 호수를 내려다보며 더 넓은 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가. 선금을 받은 상인이 배를 정비하는 며칠 동안 모모와 카시는 자주 바닷가로 향했다. 해가 달이 되고 밤이 찾아오면, 부드러운 모래 위를 덮었다가 밀려나는 물을 오래 바라보았다. 카시는 자주 물에 손이나 발을 담갔고, 어느 날에는 양손으로 물을 떠올려 그것을 마셨다. 그리고 마물의 물이 몸 안에 돌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없이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모모는 가뭄 때 바닷물을 길어오는 사람들의 기록을 알았기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무 맛도 안 나네요!' 마침내 카시가 그렇게 말했다. 시시한 진실은 항해의 보탬이 될 단서로 두 사람의 머리 한구석에 남았다.

 

 "…그러니까 구멍이 보인다면 땅여우가 있을지도 몰라. 열매 한 두 개 정도 던져줄 여유가 있을 때 도착하면 좋은데."

 "친해진다면 한 마리 데려가고 싶네요! 개 대신에 키우는 거죠."

 "개는 키워본 적 있어?"

 "아뇨, 모모는?"
 "나도. 왕성에서 기르는 경비견이라도 한번쯤 만져보고 싶었는데 허락을 못 받아서. 아."

 "음…?"

 "카시, 지금 하나도 안 졸리지."

 "아~… 먼저 말해버렸네요!"

 

 이러다 밤을 새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에 모모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잠이 안 오게 하는 요인은 한 손을 다 접고도 남을 만큼 있었다. 잊을 수 없는 낮이 지나간 후에 잠들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노 젓기는 검술과는 다른 노동이라 몸 곳곳이 욱신거렸다. 그리고 밤, 물 위. 비 오는 날이 아니면 리탄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던 추위는 이곳 이 시간에 모여 있었다. 모모가 천을 조금 끌어올렸다. 

 

 “꽤…… 춥네. 그래서 잠이 잘 안 오는 걸지도. 천을 한 장 더 사둘걸.” 
 “우리 왕자님, 바다랑 체질이 안 맞는 모양이네…… 내 옷이라도 벗어줄까요?” 
 “아니, 아니괜찮아. ……또 놀리고 있는 거지?”


 대답 대신 히죽 웃은 카시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불길한 예감이 들 때까지 빤히 얼굴을 내려다보던 카시가 양손으로 모모의 푹신한 옆머리를 누르더니, 손가락을 머리카락 사이에 넣어 헝클어뜨렸다. "정답이에요!" "우왓. 맞췄으면 상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게 상인 거죠~ 싫어요?" "글쎄, 일단 내일 일어나면 머리가 볼만하겠네." "그래도 참아요! 여우를 만지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손이 심심해졌거든요." "봐, 상이랑 관계 없잖아."

 

 한참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으며 놀던 카시의 손이 마침내 멈췄다. 멈췄지만 떨어지지 않고, 부드러운 이마를 건드린다. 가지런하게 닿은 네 손가락이 앞머리를 쓸어 옆으로 넘겼다. 뒤늦게 닿은 엄지가 이마를 문질렀다. 그대로 엄지로 이마를 꾹 누르고 있자 모모가 뭘 하냐는 듯이 웃었다.

 “선정인이라도 만들어주려고?”

 이번에는 카시가 웃었다. 살짝 힘주어 대고 있던 엄지가 옆으로 밀려나듯 미끄러졌다.

 “카시가 만약 아네키우스 님이라도 지금은 안돼요! 왕자님 이마에 인이 생겨버리면 뱃머리를 돌려야 할 테니까.”

 모모가 자기 이마를 한 번 만져보다가 천 위로 팔을 내렸다. 작은 배는 이미 바다 한복판에 있고 눈 앞에 있는 여자가 아네키우스의 화신일 리도 없다. 선정인, 신이 내린 관. 태어난 순간에 결론이 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이마에 머물렀다가 모른 척 떨어지는 시선은 때때로 그들 눈에 선정인과는 다른 낙인이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가능성이 있었으나 선택받지 못한 몸. 왕자의 깨끗한 이마는 신의 손이 닿지 않은 이마다. 모모가 한 번 숨을 들이켰다. 물기 어린 공기가 가슴 속에 시원한 감각을 남겼다. 왕성의 공기는 언제나 긴장을 머금고 떠도는 소문을 실어날랐다. 소문에 마음 안쪽이 닳아 날카로워지는 걸 견딜 수 없게 된 사람들은 하나 둘 왕성을 떠났다. 모모는 오래 남아있던 편이다. 태어나 성인이 되고 앉을 수 없는 왕좌 앞에 두 총애자가 불려오기 직전까지 견뎠으니까. 곧 칩거가 끝나고 새 왕이 왕좌에 앉는다. 누구도 짐작 못 할 신의 의지로 두 번째 총애자가 세상에 태어난 지 15년, 사람들은 신의 의도를 해석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리라.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먼 일처럼 느껴지는 그 성을 떠올릴 때 모모는 자주 두 어린 총애자를 떠올렸고,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 역시 함께 떠올렸다. 


 “생겨도 이제 와서 돌아가진 않을 거야.”
 “정말로?”
 “그야, 선정인이 없어도 돌아가면 난리가 날 텐데. 없던 인까지 생겨서 오면… 상상하기 무섭지 않아?" 
 “그건 그래요…! 내가 갇힌 방에 모모가 또 갇힐 수도 있겠고.”

 카시가 키득키득 웃었다. "다행이네…." 짧은 말 뒤에는 설명이 붙지 않았다. 모모가 떠나지 않아서, 이 배 위에 혼자 남겨질 일이 없어서, 내가 신관이 되지 않고 당신이 왕이 되지 않아서, 아니, 처음부터 우리 둘 다 될 수 없어서. 모모는 대답하지 않고 하늘에 고정된 녹색 달을 보았다. 두 사람 각각의 마음 속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조립된 배가 정박되어 있었다. 배를 땅에 묶어둔 밧줄은 공통적으로 한 문장이었다. 떠나면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나고 자란 땅,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곳에.

 

 나뭇잎 색 빛이 모모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카시는 감기지 않은 모모의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녹의 달은 카시가 가장 미워하는 달이다. 그래서 그는 녹의 달에 하늘을 보지 않는다. 아이가 성인이 되고 자라난 몸이 빛 아래에 드러나면 신에게 인정받은 것을 축하하는 작은 축제가 열렸다. 잠이 깬 카시는 바닷물로 뜨거운 몸을 씻고 싶었으나 바다는 멀리 있었다. 전부 옛날 일이다. 다시 몸을 눕힌 카시가 모모의 옆얼굴을 보았다. 달빛에 드러난 그의 깨끗한 이마를. 어린 시절 캐시아를 신관으로 키우고 싶었던 남작은 잠 못 드는 밤마다 성서를 읽어주었다. 캐시아는 잠든 척 눈을 감고 있다가, 어머니가 방을 나가면 눈을 뜨고 창문 너머로 빛나는 달을 보았다. 신은….

 

 “신은 우리의 머리 위에 계시며, 그 얼굴을 항상 우리에게 향하고 계시니.”

 모모의 시선이 달을 떠나 카시를 향하면 장난스러운 웃음이 그를 마주했다. 카시가 두 사람의 몸을 덮고 있던 커다란 천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두 사람의 머리를 천으로 완전히 덮었다. 빳빳하고 촘촘하게 짜인 천은 희미한 달빛을 통과시키지 않는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완전한 어둠이었다. '의심하지 말지어다, 나의 백성아. 어느 때에도 곁을 거니는 그 마음을. 한탄하지 말지어다, 나의 백성아. 그 분의 손은 눈물 젖은 뺨을 매만지시니.' 카시의 목소리가 그의 기억 속 어머니의 목소리와 겹쳐진다. 어둠 속에 울리는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섞여있다. 

 “보라 그 모습을, 그 힘을. 빛 닿는 곳에 반드시 그 분의 자비가 있으리.”

 

 빛 닿는 곳은 어디나 신의 은혜로 가득 차 있으니, 빛이 닿지 않는 곳이야말로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고.

 선택받지 못한 왕자가 신을 모욕한 죄인을 데리고 도망쳤던 날에, 천이 드리운 그림자에 얼굴을 숨기고 끝없이 말을 흘리던 입술을 다물었을 때. 카시는 자신의 앞을 걷는 남자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얇은 어둠에 태양이 틈 없이 가려진 날에는 신의 귀를 피해 인간끼리 비밀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던 것이다. 사실은 바다의 건너편이 궁금하지 않았어요. 당신과 같은 배를 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 배를 띄우고 싶었으니까. 저 저주스러운 태양빛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아요! 하지만 그런 곳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죠. 봐요, 모모. 당신은 날 구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러나 돌아본 모모와 눈이 마주친 순간 카시는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천으로 만든 어둠 속에서 카시가 묻는다.
 “아무 데도 도착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래요?”
 “그때는….” 
 모모는 살아있다면, 같은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는 사람이고,
 “또 다른 곳으로 가봐야지.”

 ‘바다로 갈 거야, 카시.’ 이것은 죽기 위한 여정이 될 수 없다. 이 손에 붙잡힌 이상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삶에서 가장 먼 곳, 모두가 그 끝에 죽음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곳을 향해 가면서도.

 

 그리고 두 사람은 바다에 도착했다. 바다는 여전히 고요하고, 아직 잠들지 않는 두 사람의 목소리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다.

 

 “벽을 넘어보는 건 어때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것도 괜찮지. 그보다 카시… 슬슬 답답하지 않아?"

 "하~나도! 안 춥고 좋잖아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모모의 표정이 보고 싶어졌지만 카시는 천을 내리지 않았다. 모모 역시 카시의 변덕에 어울려주려는 듯 한동안 어둠 속에 가만히 숨을 죽였다. 리탄트보다 더운 공기에 숨이 답답해질 때까지. 떠나왔으니 돌아갈 수 없다. 이제 닻이 된 문장이 둘을 먼 바다로 떠밀었다. 찰박, 찰박, 일정한 리듬으로 물이 배에 부딪히는 소리. 작은 배는 록차처럼, 또는 요람처럼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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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9I8Sbi0AP5I

연속 재생으로 들어주시면 감사합니다...♥ 

 

 

 

 

 

 


 악기 하나만 가지고 쉘터 밖 세상에 나온 소녀들이 있다. 지금 이곳에도 있지만, 2년 전에도 그런 소녀들이 있었다ー어쩌면 소녀들의 운명이란 이런 식으로 반복되는 것일지도 모른다ー. 필사적인 면역 반응이 무색하게 소녀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소녀들은 세상의 여백, 관객 없는 폐허에서 노래했다. 가끔은 이 키스로 세상이 끝나도 좋을 것처럼 입을 맞췄다. 소녀들은 정말로 이곳에서 세상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려울 게 없었다. 소녀들은 음악 속에 있었다. 온 세상이 음악이었고, 그들이 음악이었다. 불타는 영혼과 함께 죽어가는 소녀들은 음악 그 자체였다. 

 그곳에서 카시는. 아니 캐시는 스모모를 생각했다. 여기에 네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스모모, 나는 이제야 음악을 이해했어. 세상에는 정말로 깨닫는 순간 돌아갈 수 없는 진리란 게 있었던 거야.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둥근 막에 감싸인 채 살아가고 있었어. 그러다 그게 톡, 하고 비눗방울처럼 터져버리는 순간에…… 그 막이 나만은 살아남을 거란 안쓰러운 착각의 방패에 불과했고 사실은 쉽게, 너무나 쉽게, 우리가 죽을 수 있다는 걸 이해하는 순간에…… 그제서야 진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야. 그 진리를 쏟아내는 유일한 방법이야말로 음악인 거야. 정말이야, 스모모. 믿어 줘. 여기에 와서야 난 진정한 음악을 알았어. 말을 잊은 혀로도 노래하고 부러진 다리로도 춤을 추는 사람들을 봤어. 몸이 너무 뜨거워. 계속 음악 소리가 들려. 나 지금 기분이 정말로 좋아.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세상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자전하고 있는지 알아? 제트코스터보다 더 빠르게, 몸이 추락하는 순간에도 느껴지는 짜릿함, 아, 죽음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쾌감그리고 있지, 이 모든 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맞아, 꼭 펑크 록을 닮았어……. 

 그러나 캐시가 진정으로 바라던 장면은 이런 말을 스모모에게 전하는 게 아니다. 말을 할 필요도 없이 그저 별이 잘 보이는 폐허의 옥상 위에 무릎을 모으고 나란히 앉아서, 먼지 덮인 바닥을 두려워하지도 않은 채 손을 겹치고, 고개를 돌려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해하는 낭만적인 순간을 바란 것이다. 우리는 같은 음악을 듣고 있구나. 그렇게 확신하는 순간 분명 캐시는 용기를 내서 스모모에게 먼저 키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스모모는 없다. 왜냐하면 캐시는 이 모든 걸 스모모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탈락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진정한 락을 찾아 떠나겠다는 말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말 없이 등을 보이고 떠나는 주인공들이 멋있게 보일 나이가 아닌가! 그들은 언제나 승리와 함께 돌아왔고, 캐시는 그 나잇대의 소녀들이 으레 그렇듯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멋진 음악이 흐르고, 키스를 하고, 해피 엔딩. 봐,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한텐 멋있게 보이고 싶은 법이잖아……. 언제나 멋있는 건 네 쪽이었으니까. 그래, 넌 정말로 멋있었어. 다정하고, 강하고, 언제나 내 손을 잡아 끌어줬지. 네가 좋았어, 스모모. 지금도 할 수만 있다면 너와 함께…… 



 

 






 "있지 캐시. 난 죽음 같은 건 두렵지 않아." 

 버스가 덜컹거리는 진동이 몸을 흔들면 카시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다. 바로 앞에 스모모가 있다. 수도로 향하는 버스 안이었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심지어 대화를 위해 카시가 스모모의 옆 자리에 찾아와 앉았음에도) 카시는 순간 스모모가 왜 자신의 앞에 있는지 몰랐다. 다인 버스 특유의 먼지 냄새가 나는 커튼은 묶여 있었고, 스모모 뒤의 창문 너머로 폐허의 광경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소녀들의 목소리는 달콤한 재즈와 잘 어우러졌다. 그리고 스모모. 스모모는 무언가 말을, 아주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데,

 "정말로 무서운 건 살아가는 거야." 어지러워. 카시는 눈을 비볐다. 물론 카시는 울지 않았고 (정말로!), 그저 고열에 현기증이 났을 뿐이다. 그러나 선명한 시야에 스모모가 담기면…… 이상하다, 스모모는 이렇게 귀여운 아이돌 의상이 잘 어울리는 소녀였던가? 커다랗게 반짝이는 별, 분홍색 리본, 사랑스러운 프릴…… 함께였을 때 우리는 어떤 옷을 입고 있었지. 스모모가 들고 있던 기타는 어떻게 생겼더라. 우리가 같이 골랐던 피크는…… "그리고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 아니야, 스모모. 제발 말하지 마…….

 그리고 눈이 마주친다. 혜성과 혜성이 충돌한다. 눈꺼풀 안쪽에서 별이 반짝이며 터진다. 아라카와 스모모의 눈 속에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진리다. 누구도 세상의 진리가 하나뿐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산다. 누군가를 슬프게 만들지 않기 위해 견디는 삶이다. 까만 두 눈은 삶의 음악을, 살아서 하는 음악을, 눈부시도록 반짝이는 음악을 속삭이고…… 그제야 카시는 반짝! MEZASE 걸즈의 유니폼이 스모모에게 잘 어울렸던 이유를 이해한다. 그러나 거대한 깨달음의 순간은 벼락처럼 짧게 빛나고 끝날 뿐이다. 한 사람의 세계에 두 개의 진리는 공존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의 진리는 숲을 태우는 거대한 불이 되어 지금도 다가오고 있으니까. 친구도, 가족도, 집에 있던 사랑스러운 고양이도, 햇살이 내리쬐면 반짝이던 금발, 점심 시간을 알리는 벨이 경쾌했던 학교, 손을 잡고 복도를 달리던 발소리, 수업 시간에 비밀스럽게 마주쳤던 눈빛, 기타의 현과 플라스틱 건반이 서로를 위해 호흡을 맞추던 순간, 그래 우리 음악을 하자, 음악을 하는 거야, 언젠가 최고의 밴드 걸이 되어서… 그런 추억이 정말로 있었던가? 모든 것은 음악을 위한 연료로 불 속에 던져져 새하얀 재가 되었다. 되어가고 있고, 완전히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스모모에게는 함께 죽을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카시는 스모모의 눈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 대신 그 너머의 창문, 창문 밖의 세상을 봤다. 버스는 수도로 향하고 있다. 그거면 됐어. 다시 스모모를 보면, 이제 괜찮다. 고열. 음악 소리. 숨이 가쁘다. 뜨거워. 심장이 터질 것처럼 벅차오르고, 아, 사랑하는 스모모, 내 마음 속에 흘러넘치는 사랑을 꺼내서 보여줄 수만 있다면안 돼, 이대로는 터져버릴 거야…… 아직은 안 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이 말을 꺼내면서 카시는 또 하나 슬픈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다. 널 사랑해, 하지만 우리는 서로 영영 이해할 수 없어. 그 말이 생각보다 로맨틱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는 사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 가까워지려고 할 수록, 말을 할 수록 단절은 거대한 구멍처럼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다. 카시는 기울어지는 판자 위에 있는 것처럼 철렁하는 기분을 느낀다. 그마저도 순식간에 몸이 떨릴 정도의 쾌감이 되고ー이것이야말로 고장난 머리의 최대 장점이다ー그래서 카시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이 된다. "스모모, 난……." 그리고 그의 나쁜 버릇. 카시는 스모모의 뺨에 뜨거운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걸로 전부 괜찮아질 거야. 카시가 고개를 기울인다. 입술이 맞닿기 직전이 되어서야 그는 정말로 울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이 키스로 세상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늦었어." 그리고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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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장

2019. 12. 3. 20:30 from 카테고리 없음

 

 

 

 “야채만 먹지 마, 클라리스! 편식은 몸에 안 좋아.”
 “레인, 그건 역시 제가 할 말 같은데…….”

 클라리스의 대꾸에도 아랑곳 않고 레인은 클라리스가 든 접시 위로 고기 몇 점을 옮겼다. 그리고 보답으로 잘 구워진 아스파라거스를 받기 전에 슬그머니 자기 접시를 들어올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테라스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여기서까지 잔소리할 건 아니지? 하는 무언의 눈빛에 말을 삼키게 되는 건 결국 클라리스 쪽이었다. 갈 곳 잃은 집게가 무방비하게 놓인 폴의 접시 위에 조심스레 아스파라거스를 내려두었다. 편식과 무관한 세상의 폴은 여전히, 조금 걱정스러울 만큼 열심히 그릴 위의 재료들을 뒤집고 있었다. 

 “……저기, 이제 제가 구울게요. 폴도 좀 먹어요…….”
 “앗…… 저 먹으면서 굽고 있어요! 어차피 이것까지만 구우면 끝이니까…….”

 짧게 한눈을 파는 동안 집게가 그릴과 부딪혀 캉, 소리를 냈다. 당황한 폴이 다시 검은 줄이 생긴 가지를 뒤집는 데 집중했다. 이걸로 두 번째 퇴짜였고, 폴의 말대로 저녁 식사는 끝나가고 있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솔선해서 일을 도맡아 하게 되는 걸까. 굳이 따지자면 클라리스도 그런 쪽이었지만 이런 류의 사람들에겐 본인의 노동에 대한 객관화가 부족한 경향이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릴에서 멀어진 클라리스는 레인이 앉은 의자 옆, 색깔만 다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숨을 돌렸다. 오랜 운전으로 굳은 어깨의 긴장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도착한 별장은 다행히 실망할 구석 없이 근사했다.


 바다 가고 싶어. 그렇게 말한 건 열흘 전의 레인이었다. 이 집에서 생기는 돌발적인 행사는 주로 레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계기가 되었다. 폴과 클라리스는 어떤 이야기든 결국 진지하게 듣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거실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좁은 화면을 셋이서 들여다보게 되었다. 열흘만에 정말로 바다에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플로리다의 별장 테라스에 앉아있는 지금도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면서, 클라리스는 레인에게 받은 고기를 삼켰다. 두 사람은 바다 여행이 처음이라고 했다. 사람이 적은 해변에 가볼까 하다가도 유명한 곳을 고른 건 역시 처음인 만큼 실패가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여기 어때? 여기. 이름은 좀 별로지만. 레인이 가리킨 곳은 4.5개의 별이 반짝이는 플로리다의 해변이었다. 이름은 클리어워터 비치. 과연 지나치게 솔직한 이름이라고 클라리스도 생각했다. 그래도 이름의 투박한 인상을 덮기에 충분할 만큼 사진 속 하얀 모래사장과 투명하게 파란 하늘은 아름다웠다.

 "내일은 바다 갈 수 있겠지?”
 “그럼요…… 사실 오늘도 산책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예요.”
 “진짜? 그럼 다 먹고나서 보러 갈래.”

 마지막으로 구워진 고기와 야채를 차례차례 레인과 클라리스의 접시에 옮긴 폴이 마침내 집게를 내려놓았다. 그릴의 불이 꺼지자 난로가 꺼진 것처럼 생생한 추위가 잠시 세 사람을 쓸고 지나갔다. 그래도 가을 바람이니 참을만 했지만, 다들 아직 온기가 남은 접시 바닥을 손바닥 위에 두었다. 

 “무슨 얘기 중이었어요?
 “다 먹고 바다 가자!”
 “지금요? 내일 가는 줄 알았는데.”
 “내일도 가요. 오늘은 그냥 산책 겸이니까.”

 방한 점퍼를 입은 폴이 집게를 쥐고 있던 쪽 팔을 들어, 소매에 밴 탄 내를 맡았다. "셋이 가면 우리가 뭐 먹었는지 사람들이 다 알겠네요." 클라리스가 쓴 웃음을 지으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서늘한 바닷 바람이 고기 냄새를 지워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뭐 어때? 자랑하면 되는 거지." 아니면 우리 모두 레인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되거나.

 




*


 

 성수기를 비껴간 10월 중순, 공기는 맑았고 클리어워터 비치 역시 이름 그대로 깨끗한 바닷물을 자랑하고 있었다. ‘바다 앞 별장’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한 것이 무색하지 않게 별장 테라스에서 바다까지는 걸어서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별장은 해변의 끝자락에서 직선 거리에 위치했고, 가을 늦저녁의 바닷가 구석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바다 위로 덮여가는 석양은 여행지 소개 사이트의 축소된 사진보다 선명하고 진한 오렌지빛이었다. 

 "나 모래사장에서 맨발로 걸어보고 싶었어."

 운동화와 양말을 벗고 레인이 맨발로 하얀 모래 위를 걷기 시작했다. 소리는 작고 부드럽게 사락사락 울렸다. 클라리스는 모래 위의 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따라 걸었다. "……어때요? 부드러워요?" “엄청…….” 그렇다면 세 사람의 길고 긴 회의는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해변 가득 둥근 유리조각이 반짝인다는 캘리포니아의 글래스 비치는 일찌감치 후보에서 제외됐는데, 그 때도 레인은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레인을 따라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던 폴이 문득 모래 위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시선이 집중되자 폴이 머쓱하게 주운 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게 뭐야?" "1센트요." 그 후로는 한참, 그러니까 폴이 울컥할 만큼 오랫동안 레인이 웃는 소리가 계속됐다. 

 “행운의 사나이는 역시 다르네~”
 “그만 놀려요, 좀!”

 레인이 보란듯이 혀를 내밀었다. 부드러운 모래 위로 맨발이 남긴 발자국이 이어졌다. 운동화만큼 선명하게 남지 않은 뭉개진 발자국. 클라리스는 자국이 지워지지 않게 레인이 앞서 간 길에서 조금 옆을 걸었다. 넓고 물결 무늬가 남은 모래사장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사막처럼 느껴졌다. 운동화 끝으로 모래를 살짝 파올리듯이 차보면서 걸으니 걸음 속도가 느려졌다. 모래를 파헤친다고 동전이 굴러나오진 않았다. 역시 행운의 사나이만 할 수 있는 건가, 클라리스가 생각했지만 말로 하진 않았다. 슬슬 체념한 폴이 한숨을 내쉬고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던 참이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렌즈가 노을지는 바다를 향했다. 몇 번인가 필름을 새 것으로 바꾼 뒤라 사진을 찍는 포즈가 제법 그럴듯해져 있었다. 찰칵 소리는 사실 셔터를 누를 때 차르륵 하는 소리와 손가락을 뗄 때 캇, 하는 소리로 나뉜다는 것도 폴을 보는 사이에 새로 배우게 된 사실이었다. 셔텨를 누른 폴이 기계음과 함께 밀려나오는 사진을 기다렸다.

 

 "즉석 사진은 따뜻해야 잘 나온대요."

 "정말요? 오늘 추운데 아, 그럼 리스, 이거 잠깐만요."

 

 사진을 잠시 클라리스에게 넘긴 폴이 손을 모으고, 손바닥 안쪽으로 입김을 불더니 손바닥을 비볐다. 차가운 손이 충분히 따뜻해질 만큼 마찰열이 남은 후에 폴은 점퍼 안쪽 긴팔 옷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다시 클라리스에게서 받아든 사진이 소매와 따뜻한 양손으로 덮였다. 그 모습은 하나의 조심스러운 의식처럼 보였다. 덮었던 손을 치웠을 때, 사진은 폴라로이드 사진 특유의 빛바랜, 그러나 충분히 선명한 석양의 오렌지색과 바다의 민트색을 담고 있었다. 앞서 걷던 레인이 발걸음을 늦추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웃음기가 배어있지만 농담처럼 들리지는 않는 말투로, 잘 찍었네, 레인은 그렇게 말했다.


 "여기서도 카메라 살 수 있을까?
 "일회용 카메라 정도라면관광지니까 어디선가 팔고 있을 거예요. 가게는 다 닫았지만.”
 “사진 찍고 싶은 거면 카메라 빌려드릴 수 있는데…….”
 “으음~……. 아냐! 역시 내 걸로 찍을래.”
 “아, 돌아가는 길에 상점가 앞으로 돌아갈까요. 몇 시에 여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어느 샌가 해변에는 긴 발자국이 줄을 이룬 채 남아 있었다. 폴은 사진을 두 장 더 찍었고 세 장의 사진은 가방에 있던 미니 앨범 속에 안전히 보관되었다. 10월은 해가 빠르게 지기 시작하는 달이다. 슬슬 주변은 호박색 대신 어두운 남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돌아갈까요, 누군가는 그렇게 말해야 했고 세 사람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

 

 모래사장은 해변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 후에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사박거리는 발소리도 셋이나 모이면 제법 크게 들렸다. 상점가에 가려면 해변을 나와 한 번 차도를 건너야 했다. 모래사장이 끝나는 경계선 앞에서 레인이 우뚝 멈춰섰다. 

 "양말 못 신겠어…… 폴! 나 좀 업어 봐." 
 "아까 그렇게 놀려 놓고 이럴 때만……. 털고 신으면 안돼요?" 
 "까끌까끌해서 기분 나쁠 것 같단 말이야……. 그럼 클라리스가 업어 줘." 
 "제가 업으면 떨어뜨릴 것 같은데……." 
 “…….”
 “…….”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아, 그럼 카메라는 제가 들게요…….”

 툴툴거리면서도 폴이 자세를 낮추자 레인이 기다렸다는 듯 등에 업혔다. 레인이 한 손에 모아 든 운동화에서 하얀 모래가 떨어졌다. 클라리스가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받아들었고, 렌즈를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다가 그대로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가 사진을 뱉어내는 동안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을 감추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결국 클라리스가 웃었다.

 

 "둘이 사이 좋아보여서요."
 "아니."

 거든요, 라고 말을 끝맺지는 못하고 폴이 입을 다물었다. "우리 사이가 좀 좋지~"하고 레인이 폴의 목을 끌어안는 시늉했을 때는 말을 멈춘 걸 후회하는 눈치였지만. 차도를 건너느라 혼란은 어쩔 수 없이 잦아들었다. 어느 샌가 인화가 끝난 사진을 클라리스가 내려다보았다. 바다와 저무는 해를 등진 두 사람의 사진은 조금 어둡고 흔들려서 빈 말로도 잘 찍었다고 하기엔 어려웠다. 그래도 클라리스에게는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이 사진은 달라고 해야지, 옆 사람의 그런 생각과 무관하게 폴이 다시 말을 꺼냈다. "어쨌든,"

 

 "그렇게 말할 거면 셋이라고 해야죠. 리스도 같이 다시 찍어요."

 "아, 그럼 그건 내가 찍을래! 빨리 와 봐, 클라리스." 

 

 카메라가 레인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리기도 전에 레인은 카메라를 든 팔을 최대한 뻗었다. "앗, 잠깐…." "찍는다? …하나!" 둘과 셋 없이 셔터 소리가 울렸다. 벙찐 두 사람에게는 무자비하게도 카메라는 공평하게 작동했다. 사진을 뱉어내는 모습이 조금 얄밉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지른 일이 있는 만큼 할 말이 없는 클라리스는 체념의 표정을 지었고, 두 번이나 무고하게 당한 폴만 "치사하잖아요!"하고 항의했다. 둘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레인은 시선을 피해 인화되어 가는 사진을 확인했다. 그리고 씩 웃더니 사진을 그대로 겉옷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괜찮아, 잘 나왔으니까."
 "절대 안 믿어요…."

 

 어찌 됐든 찍힌 사진은 되돌릴 방법이 없으니까. 세 사람은 걸었고, 문 닫은 가게의 어두운 쇼 윈도 위에 셋의 모습이 비쳤다가 다음 가게의 유리 위로 옮겨가기를 반복했다. 사람이 끊이지 않는 관광지의 여유인지 대부분의 가게는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연다고 되어 있었다. 어느 샌가 화제는 다음으로 넘어가 돌아가면 잘 때까지 카드 게임을 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일은 늦잠을 자게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늦게 열어서 다행일지도 몰라, 11:00이라는 하얀 글씨들을 보면서 클라리스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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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후 로그

2019. 10. 18.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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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폴

2019. 9. 20. 01:37 from 카테고리 없음





 이제 두 사람에게 말은 필요 없다. 그들은 같은 감각을 공유한다. 영화는 깜빡, 하고 암전과 페이드인을 반복하고 있다. 부드러운 노래 소리가 두 사람의 눈꺼풀을 감겼다. 닫지 않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선선한 바람이 담요처럼 몸을 덮었다. 


 아주 쉬운 말로, 폴과 클라리스는 술에 취해 잠이 들기 직전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가벼워진 맥주 캔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다. 폴은 소파에 몸을 완전히 기대고 있었고, 기울어진 고개의 각도로 보아 영화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나른해진 사람들에게 2시간의 상영 시간은 길었다. "폴, ……자요?" 잠들었나…… 하고 생각하고 몇 초가 지나서야, "아직……."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침대에 가서……" 자는 게 어때요. 마지막까지 또렷하게 말을 마쳤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졸려보이는 폴을 보고 웃고 싶었는데, 클라리스가 간과한 것은 자기 상태가 남을 보고 웃을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조금 남은 타르트를 상자에 넣어둬야 할 텐데. 캔도 치우고……. 하지만 몸을 끌어내리는 졸음의 중력에 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폴의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화면 속 홀리가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영화를 마무리짓는 문 리버가 흐르고 있다. 평화롭게, 안심하고 잠들어도 된다는 듯이. 









 "어. 이건 뭐예요?" 

 "빈 손으로 올 순 없는 걸요. 타르트만 몇 개 사왔어요." 

 "우와, 이렇게 안 챙겨줘도 되는데……! 저 이제 부자라구요~" 

 "하하…… 그보다 폴, 요리하고 있었어요?" 

 "네, 이제 거의 다 됐으니까…… 아! 으앗, 타겠다! 거기 편하게 앉아있어요!" 


 다급하게 폴이 부엌으로 뛰어가고, 클라리스가 짧은 웃음을 흘릴 시간과 함께 거실에 홀로 남겨진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보자. "타르트는 냉장 보관이래요." 뒷모습을 향해 한 마디 덧붙이고, 그제야 클라리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환기를 위해서인지 조금 열어둔 창문을 통해 미적지근한 바람이 집 안을 흘렀다. 새 것으로 보이는 소파에 앉아도 될지 잠시 망설였지만, 멀뚱히 서있었다가는 돌아온 폴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게 뻔했다. 조심스레 소파에 앉자 새 벽지를 바른 단정한 벽과 천장, 좋은 목재로 만들어졌을 테이블과 협탁이 한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의 집임에도 묘한 안심감을 느끼게 하는 안정적인 배치였다. 부엌에서 일정한 리듬을 타고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좋은 냄새가 풍겨오고 있다. 이곳이 폴 브라운이 앞으로 살게 된 새 집이었다. 과연 당첨 복권은 인생을 180도 뒤집어 놓는다. 


 터널 붕괴 사건에서 구조된 생존자들 대부분은 경미한 부상과 영양 실조 상태에 그쳤지만, 폴과 클라리스를 포함한 몇몇 생존자들은 처음부터 응급실로 이송되었을 만큼 상태가 심각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살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간신히 눈을 떴다ㅡ설명의 수고를 덜기 위해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두자ㅡ. 눈을 뜬 생존자들은 서로의 무사를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 의사는 물론 존중되었고, 그 후로 이어진 길고 지루한 입원은 못다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보장해주었다. 뒤에 가서 폴과 클라리스는 아예 다인실에 함께 넣어졌는데, 서로의 병실에 끝없이 들락날락할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은 사건이었다. 재활 훈련이 마무리될 쯤에 두 사람은 제법 가까운 사이의 친구가 되어 있었다. 적어도 이렇게 집들이에 초대 받을 정도로는 말이다. 


 가스 불을 끄는 소리에 이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왔다.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두는 중일 거라고 클라리스는 짐작했다. "폴, 도울까요?" "괜찮아요!" 아마 지금 도우러 가면 리스는 손님이잖아요! 하고 다시 거실로 보내지겠지. 클라리스는 얌전히 기다리기로 한다. 거실 벽면에는 커다란 TV가 설치되어 있다. 식사하는 동안 폴에게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이 있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클라리스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접시와 식기가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클라리스가 좋아하는 소리 중 하나였다. 아직 그가 어렸던 시절 포스터 가족은 거실의 TV를 틀어두고, 부엌에 놓인 4인용 테이블을 둘러앉은 채 식사를 했다. 잘 편집된 드라마의 음악과 대사가 조화롭게 배경으로 깔리면, 그 위로 겹쳐지는 식기의 소음은 신경에 거슬리지 않고 정겹게 느껴졌다. 반면에 폴은 끼니를 혼자 해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돈이 없다는 건 끝없이 시간을 돈으로 환전해가며 진 적 없는 빚을 갚아야 한다는 뜻이었고, 필연적으로 그는 값싸거나 급하게 식사를 끝낼 수 있는 음식을 골라야 했다. "멋진 식탁이 있는 집을 사게 돼서 다행이에요." 클라리스가 나이프를 움직이는 것도 잊고 그렇게 말하자, 폴은 처진 눈썹으로 웃었다. 


 사고 전의 일상, 자주 먹었던 음식, 서로가 해본 아르바이트, 대학에서 있었던 일(폴은 이 이야기에 조금 흥미를 보였다), 아, 스튜 맛있어요, 정말요? 다행이다…… 소소한 이야기를 곁들인 식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새 TV로 뭘 봐야될지 고민이에요. TV를 오래 본 적이 없어서……." 폴이 그런 말을 꺼냈을 때, 클라리스는 문득 며칠 전 채널을 돌리던 중에 우연히 얻은 정보를 떠올렸다.  


 "8시부터 고전 영화 특집을 한대요.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랑, 그 다음이 뭐였지……."  

 "어…… 저 그 영화 못 봤어요. 유명한 건 아는데." 

 "그래요? 아…… 그러고보니 남자 주인공 이름이 폴이네요." 

 "정말요?! 우와, 보면 엄청 신경 쓰일 것 같아……. 폴은 흔한 이름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요." 

 "아하하……. 새 집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폴이 괜찮으면 같이 볼래요?" 

 "저야 상관 없는데……. 리스가 괜찮겠어요? 그러니까, 집에 가기 너무 늦지 않아요?" 

 "걱정 마세요. 저 택시 잘 잡아요." 


 "피곤한 학생은 택시 기사분들이 잘 돌봐주시거든요." 아직 온기가 남은 스튜의 마지막 한 스푼을 뜨면서 클라리스가 식사를 마무리했다. 다행히 그릇을 부엌으로 돌려두는 일은 폴이 (내켜보이진 않아도) 허락해주었기 때문에, 계산대 앞에서 매번 둘이 벌이는 것 같은 소소한 언쟁은 없었다. 설거지를 두고는 약간의 마찰이 일어날 뻔 했지만 평화를 위해 아예 나중으로 미뤄버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식사의 뒷정리가 끝나니 오후 7시 14분이었다. 얌전한 두 관객은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꺼이 기다리기로 했지만, 식곤증까지 막을 길은 없었기 때문에 하품을 참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러다 영화 시작하기 전에 잠들겠는데요……." 

 "그러게요, 하하……." 

 "……아, 슬슬 타르트 꺼내올까요!"  


 냉장고에 넣어뒀던 하얀 종이 상자를 꺼내면서, 폴은 고민에 빠진 모양이었다. 냉장고 안에는 손님을 위해 사두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몇 가지 음료가 얌전히 간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렌지 주스와 우유를 앞에 둔 폴을 구경하던 클라리스가, 후보에 오르지 않은 복병을 툭 건드렸다. "이건 어때요?" 잘 식은 캔 맥주다. "진짜로요?"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이에요." 폴은 잠깐 고민한다. 냉장고 안에서 그의 손은 시원한 냉기를 쐬며 헤매다가, "그럼 진담으로 만들죠 뭐." 차가운 캔 두개를 집어들었다. 


 "타르트에 맥주는 처음이에요."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또 한 사람은 마찬가지라며 웃었다. 









 거실의 불을 끄고 소파에 앉자, 작은 영화관이라고 불러도 과찬이 아닐만한 분위기가 완성되었다. 과일이 올라간 타르트로 고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클라리스는 한 입 베어 문 블루베리 타르트를 내려놓았다. 화면 속에서 노란 택시가 텅 빈 도로 위를 달리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아." 폴이 목소리를 낮춰 중얼거렸다. "이 노래……." "아하하…… 처음 봤을 때 저도 그 생각부터 했어요." 문 리버의 서정적이고 나른한 음색으로 영화를 시작한 것은 감독의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마침 화면에 타이틀이 떠오르고 있고, 마침 두 사람은 각자의 맥주를 손에 들고 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캔을 부딪친다. 소파에 등을 완전히 기대자 나른한 피로감이 몸을 조심스레 눌렀다.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삼키면서 클라리스는 문득 어두운 터널과, 트럭과. 짐칸에 한가득 실려있던 미적지근한 버드와이저를 떠올렸다. 만약 미누에트가 흐르는 영화였다면 우리는 볼 수 없었겠지.  


 "저는요, 폴." 폴이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클라리스는 그를 보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지나가는 수많은 광고처럼, 그저 짧게 지나치는 말로 남기기 위해서. "손을 잡았을 때, 폴이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저도 폴의 행운을 빌려서 살아돌아온 걸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면서 클라리스는 웃고 있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빠져나온 터널에 대한, 지나간 이야기다. 곧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소란스러운 도입부가 관객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연출되었던 것처럼. 









 1961년에 개봉한 고전 영화는 21세기에 보기엔 우스꽝스럽고, 서글프며, 약간은 지루하다. 맥주는 생환의 기쁨을 축하하기 좋은 선택이었지만, 졸음을 부추기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오드리 햅번이 짓는 미소의 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눈이 감기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초반의 긴장감도 점차 사라지고, 영화의 4분의 3이 지났을 쯤부터 두 사람은 더 이상 잡담도 하지 않고 조용해졌다. 먼저 졸기 시작한 쪽이 어느 쪽이었는지 몰라도 이제 와서 중요한 점은 아니다. 클라리스는 조금 남은 맥주를 쏟아버리기 직전에 간신히 들고 있던 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면 영화는 관객들을 두고 한참 앞서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문 리버가 흐르고, 폴이 조용하고 고른 숨 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점으로.  


 그러니까 사실 클라리스는, 졸고 있던 폴이 먼저 잠들면 조용히 TV를 끄고, 몰래 준비한 선물을 두고 돌아가겠다는 나름대로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가끔씩 산타클로스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으니까 말이다. 클라리스는 자꾸만 감기는 눈을 비비고 느릿느릿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손에 쥔게 선물 상자인지 맥주 캔인지, 타르트 박스인지 몇 번인가 잊어버렸지만, 다행히 상자를 떨어뜨리는 일 없이 테이블에 올려두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졸다가 굴뚝을 오르지 못한 산타가 있다고 한다면 믿을까? 변명을 덧붙이자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찾아간 집이 아늑했다면, 따뜻한 스튜의 냄새가 남아있고 선선한 바람이 담요처럼 무릎을 덮는 곳이었다면…….


 완전히 잠들어버린 폴 옆에서, 결국 클라리스 역시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마 일어났을 쯤에는 안경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게 집 주인과 손님은 모처럼의 새 침대도 잊은 채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깊은 새벽까지 이어져 상영되는 옛 영화들은 잔잔하게, 두 사람의 잠을 방해하지 않고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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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는 혼자 여행을 떠났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막연히 두려워했던 모습으로, 그러나 막연히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던 소식과 함께 돌아왔다. 포스터 가족의 집은 웨스트 버지니아에 지어져 있었고 엄마가 예약한 호텔은 뉴욕에 있다고 했다. 시신이 발견된 곳은 펜실베니아 주의 작은 숙소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발견부터 정리까지 모든 것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경찰은 자살 후 시신의 수습을 부탁하는 엄마의 전화를 받았고, 말리려고 노력했으나, 늦었다. 유서에는 남은 가족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우울증 환자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섬세함이 담긴 문장이 가득히 적혀있었다. 장례식장에서 클라리스는 뉴욕의 호텔에서 야경을 찍겠다던 엄마의 말을 오래도록 생각했다. 믿지 말 걸. 언니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결국'이라는 말은 슬퍼서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멜리아 포스터가 한 발 앞서 삶을 끝마치고 포스터 가족의 네 일원은 남겨졌다. 이곳에서는 편의를 위해, 클라리스를 중심으로 그의 아버지와 언니, 남동생이 남았다고 하자. 그들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지만 서로를 사랑했다.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남겨진 포스터 가족을 세상에 붙들고 있는 안전벨트였다. 그들은 언제나 조심스럽게, 그리고 성실하게 서로의 무사를 확인했다. 전화로, 메세지로, 가끔은 직접 만나서 밥을 먹고, 웃어보이면서. 약은 챙겨 먹었지? 다음주 목요일 상담 잊지 말고. 학교에서 별 일 없어? 아빠도 직장에서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힘든 일 있으면 꼭 말해야 돼. 사랑해. (우리를 떠나지 마.)




*




 그 날 아침, 클라리스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언니에게 다시 한 번 괜찮다는 문자를 보내고 티셔츠 위에 체크 셔츠를 한 겹 겹쳐 입었다. 10월이 된 후로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아침에 다녀오려고 했지만 약속이 취소됐으니 조금 느긋하게 움직여도 괜찮을 것이다. 클라리스는 동네에 있는 꽃집에서 작은 조화 꽃다발을 샀다. 꽃의 이름은 몰랐지만 일관되게 우아한 보라색이었다. 엄마는 보라색 옷을 즐겨입었다. 어젯밤 외출에서 돌아오면서 경차에 넉넉하게 기름을 넣어두었다. 시동을 걸면서, 납골당에 가는 길에 긴 터널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정체된 터널 안을 지날 때면 클라리스는 라디오의 음악을 크게 틀었다. 터널이 무너지는 상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유명한 강연에 초청된 어떤 우울증 환자는 병증을 억누르기 위해 마음 속에서 끝없이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규칙적인 리듬, 잘 정돈된 목소리와 조화로운 악기의 소리가 현재를 가득 채우면, 지금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리라는 머리의 명령을 밀어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루를 더 살아남는다. 

 그리고 재난은 언제나 사람의 사정과 무관하게 쏟아져내린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잊고 지내기 마련이다. 클라리스 포스터가 살아남은 하루의 남은 절반은 무너진 터널 안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 다시 한 번 편의를 위해 시간을 돌리자. 피와 먼지 냄새, 굉음과 비명 소리에 대해서는 터널 안의 모두가 질릴 만큼 잘 알고 있으니까. 지금 사람들은 음악을 듣고 있다. 바흐의 미뉴에트는 삶의 상징이 되지 못했다. 그 대신 빨간 버튼은 선명했고, 떠오른 메세지는 명쾌했다. [이 버튼을 누르면 외부의 누군가가 죽는다.]

 클라리스는 버튼을 누르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첫 째. 누구도 타인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이것은 절대적이다. 둘 째. 지금 한 사람을 죽이면 곧 두 사람도 죽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무리 안의 균열은 언제나 치명적이고, 극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셋 째. 하나의 죽음은 스물 둘의 죽음에 비하면 작게 보이지만, 결국 죽음이란 지속적인 사건이므로. 하나의 죽음이 주위에 미치는 영향을 클라리스는 알고 있었다. 오로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 바꿔말해도 좋다. 그러니까 버튼 끝에 이어진 사람이 누구든 나는 죽이지 않겠다.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하니까. 엄마가 우리를 아프게 한 만큼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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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널 안에 있던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그의 선택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자. 어쨌든 버튼을 누르지 않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클라리스는 생존자를 위한 세 의자에 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생존자의 불문법을 잊지 않았다. 다시 되뇌어야 하는 말은 최선의 노력. 죽을 사람은 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로 노력했다고…… (그러나 결국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클라리스 포스터는 거친 콘크리트에 손바닥이 쓸리는 것을 꾹 참는다. 가만히 앉아 기다리지 않을 수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라디오의 음악이 없고, 혀가 얼얼할 만큼 단 도넛이 없고, 가족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아남는 법을 그는 몰랐지만, 열 아홉 명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고 생각하면 움직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행히 클라리스의 몸도 솔직하게 생물의 본능을 따랐다. 살고 싶어. 행동해야 해. 눈 앞에 단 하나의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가라고 머리가 아닌 몸이 말한다. 그런데, 그런데.

 전등이 깜빡이기 시작한다. 미뉴에트가 흐른다. 머리가 다시 몸을 멈추고 속삭이기 시작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의 목소리가 커질 때에는 현실의 시간도 함께 느려지는 것 같았는데. 저 불빛에는 의미가 있을까? 바닥을 때마침 굴러온 돌멩이에는? 머리가 아파오는 피 냄새에는? 이 모든 것에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나의 오래된 습관일까?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다만 손에는 무거운 콘크리트 조각이 들려 있다. 운전석에 탄 제라드 테이커가 초조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한다.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돌아갈 길은 없다. 어떻게든 머리가 아닌 몸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노력한 끝에, 마지막으로 되찾은 몸의 자유를, 클라리스는 손에서 힘을 빼는 데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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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서 처음으로 진실을 밝히자면, 다시 시작되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우리는 삶이 잔해 위를 굴러떨어지는 돌멩이처럼 나빠지기만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너진 터널은 완전하다. 무너진 터널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처음부터 무너진 터널 안에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면서. 우리 모두가 외면하지 못할 죽음을 예감하면서. 숨이 끊어진다면 자신이 첫 번째이기를 남몰래 바라면서. 네가 없었다면 죽을 수 있었을 거야. 네가 없었다면 나는 오래 전에 죽었겠지. 그랬다면 정말로 편했을 텐데. 그리고 슬펐을 거고. 또 외로웠을 거야. 사랑하고 지긋지긋한 나의 가족들. 클라리스는 다리를 지지는 끔찍한 고통이 멀어지는 걸 느끼며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가족은 두 명의 죽음을 견디기에는 너무나 약했다. 나는 엄마를 이어 그들의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될 것이다. 터널이 무너져 내린다. 어떤 사람들은 두 번의 붕괴를 버텨내지 못한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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