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두 사람에게 말은 필요 없다. 그들은 같은 감각을 공유한다. 영화는 깜빡, 하고 암전과 페이드인을 반복하고 있다. 부드러운 노래 소리가 두 사람의 눈꺼풀을 감겼다. 닫지 않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선선한 바람이 담요처럼 몸을 덮었다.
아주 쉬운 말로, 폴과 클라리스는 술에 취해 잠이 들기 직전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가벼워진 맥주 캔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다. 폴은 소파에 몸을 완전히 기대고 있었고, 기울어진 고개의 각도로 보아 영화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나른해진 사람들에게 2시간의 상영 시간은 길었다. "폴, ……자요?" 잠들었나…… 하고 생각하고 몇 초가 지나서야, "아직……."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침대에 가서……" 자는 게 어때요. 마지막까지 또렷하게 말을 마쳤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졸려보이는 폴을 보고 웃고 싶었는데, 클라리스가 간과한 것은 자기 상태가 남을 보고 웃을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조금 남은 타르트를 상자에 넣어둬야 할 텐데. 캔도 치우고……. 하지만 몸을 끌어내리는 졸음의 중력에 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폴의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화면 속 홀리가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영화를 마무리짓는 문 리버가 흐르고 있다. 평화롭게, 안심하고 잠들어도 된다는 듯이.
*
"어. 이건 뭐예요?"
"빈 손으로 올 순 없는 걸요. 타르트만 몇 개 사왔어요."
"우와, 이렇게 안 챙겨줘도 되는데……! 저 이제 부자라구요~"
"하하…… 그보다 폴, 요리하고 있었어요?"
"네, 이제 거의 다 됐으니까…… 아! 으앗, 타겠다! 거기 편하게 앉아있어요!"
다급하게 폴이 부엌으로 뛰어가고, 클라리스가 짧은 웃음을 흘릴 시간과 함께 거실에 홀로 남겨진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보자. "타르트는 냉장 보관이래요." 뒷모습을 향해 한 마디 덧붙이고, 그제야 클라리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환기를 위해서인지 조금 열어둔 창문을 통해 미적지근한 바람이 집 안을 흘렀다. 새 것으로 보이는 소파에 앉아도 될지 잠시 망설였지만, 멀뚱히 서있었다가는 돌아온 폴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게 뻔했다. 조심스레 소파에 앉자 새 벽지를 바른 단정한 벽과 천장, 좋은 목재로 만들어졌을 테이블과 협탁이 한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의 집임에도 묘한 안심감을 느끼게 하는 안정적인 배치였다. 부엌에서 일정한 리듬을 타고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좋은 냄새가 풍겨오고 있다. 이곳이 폴 브라운이 앞으로 살게 된 새 집이었다. 과연 당첨 복권은 인생을 180도 뒤집어 놓는다.
터널 붕괴 사건에서 구조된 생존자들 대부분은 경미한 부상과 영양 실조 상태에 그쳤지만, 폴과 클라리스를 포함한 몇몇 생존자들은 처음부터 응급실로 이송되었을 만큼 상태가 심각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살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간신히 눈을 떴다ㅡ설명의 수고를 덜기 위해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두자ㅡ. 눈을 뜬 생존자들은 서로의 무사를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 의사는 물론 존중되었고, 그 후로 이어진 길고 지루한 입원은 못다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보장해주었다. 뒤에 가서 폴과 클라리스는 아예 다인실에 함께 넣어졌는데, 서로의 병실에 끝없이 들락날락할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은 사건이었다. 재활 훈련이 마무리될 쯤에 두 사람은 제법 가까운 사이의 친구가 되어 있었다. 적어도 이렇게 집들이에 초대 받을 정도로는 말이다.
가스 불을 끄는 소리에 이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왔다.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두는 중일 거라고 클라리스는 짐작했다. "폴, 도울까요?" "괜찮아요!" 아마 지금 도우러 가면 리스는 손님이잖아요! 하고 다시 거실로 보내지겠지. 클라리스는 얌전히 기다리기로 한다. 거실 벽면에는 커다란 TV가 설치되어 있다. 식사하는 동안 폴에게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이 있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클라리스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
접시와 식기가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클라리스가 좋아하는 소리 중 하나였다. 아직 그가 어렸던 시절 포스터 가족은 거실의 TV를 틀어두고, 부엌에 놓인 4인용 테이블을 둘러앉은 채 식사를 했다. 잘 편집된 드라마의 음악과 대사가 조화롭게 배경으로 깔리면, 그 위로 겹쳐지는 식기의 소음은 신경에 거슬리지 않고 정겹게 느껴졌다. 반면에 폴은 끼니를 혼자 해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돈이 없다는 건 끝없이 시간을 돈으로 환전해가며 진 적 없는 빚을 갚아야 한다는 뜻이었고, 필연적으로 그는 값싸거나 급하게 식사를 끝낼 수 있는 음식을 골라야 했다. "멋진 식탁이 있는 집을 사게 돼서 다행이에요." 클라리스가 나이프를 움직이는 것도 잊고 그렇게 말하자, 폴은 처진 눈썹으로 웃었다.
사고 전의 일상, 자주 먹었던 음식, 서로가 해본 아르바이트, 대학에서 있었던 일(폴은 이 이야기에 조금 흥미를 보였다), 아, 스튜 맛있어요, 정말요? 다행이다…… 소소한 이야기를 곁들인 식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새 TV로 뭘 봐야될지 고민이에요. TV를 오래 본 적이 없어서……." 폴이 그런 말을 꺼냈을 때, 클라리스는 문득 며칠 전 채널을 돌리던 중에 우연히 얻은 정보를 떠올렸다.
"8시부터 고전 영화 특집을 한대요.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랑, 그 다음이 뭐였지……."
"어…… 저 그 영화 못 봤어요. 유명한 건 아는데."
"그래요? 아…… 그러고보니 남자 주인공 이름이 폴이네요."
"정말요?! 우와, 보면 엄청 신경 쓰일 것 같아……. 폴은 흔한 이름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요."
"아하하……. 새 집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폴이 괜찮으면 같이 볼래요?"
"저야 상관 없는데……. 리스가 괜찮겠어요? 그러니까, 집에 가기 너무 늦지 않아요?"
"걱정 마세요. 저 택시 잘 잡아요."
"피곤한 학생은 택시 기사분들이 잘 돌봐주시거든요." 아직 온기가 남은 스튜의 마지막 한 스푼을 뜨면서 클라리스가 식사를 마무리했다. 다행히 그릇을 부엌으로 돌려두는 일은 폴이 (내켜보이진 않아도) 허락해주었기 때문에, 계산대 앞에서 매번 둘이 벌이는 것 같은 소소한 언쟁은 없었다. 설거지를 두고는 약간의 마찰이 일어날 뻔 했지만 평화를 위해 아예 나중으로 미뤄버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식사의 뒷정리가 끝나니 오후 7시 14분이었다. 얌전한 두 관객은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꺼이 기다리기로 했지만, 식곤증까지 막을 길은 없었기 때문에 하품을 참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러다 영화 시작하기 전에 잠들겠는데요……."
"그러게요, 하하……."
"……아, 슬슬 타르트 꺼내올까요!"
냉장고에 넣어뒀던 하얀 종이 상자를 꺼내면서, 폴은 고민에 빠진 모양이었다. 냉장고 안에는 손님을 위해 사두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몇 가지 음료가 얌전히 간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렌지 주스와 우유를 앞에 둔 폴을 구경하던 클라리스가, 후보에 오르지 않은 복병을 툭 건드렸다. "이건 어때요?" 잘 식은 캔 맥주다. "진짜로요?"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이에요." 폴은 잠깐 고민한다. 냉장고 안에서 그의 손은 시원한 냉기를 쐬며 헤매다가, "그럼 진담으로 만들죠 뭐." 차가운 캔 두개를 집어들었다.
"타르트에 맥주는 처음이에요."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또 한 사람은 마찬가지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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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의 불을 끄고 소파에 앉자, 작은 영화관이라고 불러도 과찬이 아닐만한 분위기가 완성되었다. 과일이 올라간 타르트로 고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클라리스는 한 입 베어 문 블루베리 타르트를 내려놓았다. 화면 속에서 노란 택시가 텅 빈 도로 위를 달리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아." 폴이 목소리를 낮춰 중얼거렸다. "이 노래……." "아하하…… 처음 봤을 때 저도 그 생각부터 했어요." 문 리버의 서정적이고 나른한 음색으로 영화를 시작한 것은 감독의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마침 화면에 타이틀이 떠오르고 있고, 마침 두 사람은 각자의 맥주를 손에 들고 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캔을 부딪친다. 소파에 등을 완전히 기대자 나른한 피로감이 몸을 조심스레 눌렀다.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삼키면서 클라리스는 문득 어두운 터널과, 트럭과. 짐칸에 한가득 실려있던 미적지근한 버드와이저를 떠올렸다. 만약 미누에트가 흐르는 영화였다면 우리는 볼 수 없었겠지.
"저는요, 폴." 폴이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클라리스는 그를 보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지나가는 수많은 광고처럼, 그저 짧게 지나치는 말로 남기기 위해서. "손을 잡았을 때, 폴이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저도 폴의 행운을 빌려서 살아돌아온 걸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면서 클라리스는 웃고 있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빠져나온 터널에 대한, 지나간 이야기다. 곧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소란스러운 도입부가 관객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연출되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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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에 개봉한 고전 영화는 21세기에 보기엔 우스꽝스럽고, 서글프며, 약간은 지루하다. 맥주는 생환의 기쁨을 축하하기 좋은 선택이었지만, 졸음을 부추기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오드리 햅번이 짓는 미소의 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눈이 감기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초반의 긴장감도 점차 사라지고, 영화의 4분의 3이 지났을 쯤부터 두 사람은 더 이상 잡담도 하지 않고 조용해졌다. 먼저 졸기 시작한 쪽이 어느 쪽이었는지 몰라도 이제 와서 중요한 점은 아니다. 클라리스는 조금 남은 맥주를 쏟아버리기 직전에 간신히 들고 있던 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면 영화는 관객들을 두고 한참 앞서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문 리버가 흐르고, 폴이 조용하고 고른 숨 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점으로.
그러니까 사실 클라리스는, 졸고 있던 폴이 먼저 잠들면 조용히 TV를 끄고, 몰래 준비한 선물을 두고 돌아가겠다는 나름대로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가끔씩 산타클로스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으니까 말이다. 클라리스는 자꾸만 감기는 눈을 비비고 느릿느릿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손에 쥔게 선물 상자인지 맥주 캔인지, 타르트 박스인지 몇 번인가 잊어버렸지만, 다행히 상자를 떨어뜨리는 일 없이 테이블에 올려두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졸다가 굴뚝을 오르지 못한 산타가 있다고 한다면 믿을까? 변명을 덧붙이자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찾아간 집이 아늑했다면, 따뜻한 스튜의 냄새가 남아있고 선선한 바람이 담요처럼 무릎을 덮는 곳이었다면…….
완전히 잠들어버린 폴 옆에서, 결국 클라리스 역시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마 일어났을 쯤에는 안경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게 집 주인과 손님은 모처럼의 새 침대도 잊은 채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깊은 새벽까지 이어져 상영되는 옛 영화들은 잔잔하게, 두 사람의 잠을 방해하지 않고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