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

2019. 12. 3. 20:30 from 카테고리 없음

 

 

 

 “야채만 먹지 마, 클라리스! 편식은 몸에 안 좋아.”
 “레인, 그건 역시 제가 할 말 같은데…….”

 클라리스의 대꾸에도 아랑곳 않고 레인은 클라리스가 든 접시 위로 고기 몇 점을 옮겼다. 그리고 보답으로 잘 구워진 아스파라거스를 받기 전에 슬그머니 자기 접시를 들어올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테라스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여기서까지 잔소리할 건 아니지? 하는 무언의 눈빛에 말을 삼키게 되는 건 결국 클라리스 쪽이었다. 갈 곳 잃은 집게가 무방비하게 놓인 폴의 접시 위에 조심스레 아스파라거스를 내려두었다. 편식과 무관한 세상의 폴은 여전히, 조금 걱정스러울 만큼 열심히 그릴 위의 재료들을 뒤집고 있었다. 

 “……저기, 이제 제가 구울게요. 폴도 좀 먹어요…….”
 “앗…… 저 먹으면서 굽고 있어요! 어차피 이것까지만 구우면 끝이니까…….”

 짧게 한눈을 파는 동안 집게가 그릴과 부딪혀 캉, 소리를 냈다. 당황한 폴이 다시 검은 줄이 생긴 가지를 뒤집는 데 집중했다. 이걸로 두 번째 퇴짜였고, 폴의 말대로 저녁 식사는 끝나가고 있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솔선해서 일을 도맡아 하게 되는 걸까. 굳이 따지자면 클라리스도 그런 쪽이었지만 이런 류의 사람들에겐 본인의 노동에 대한 객관화가 부족한 경향이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릴에서 멀어진 클라리스는 레인이 앉은 의자 옆, 색깔만 다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숨을 돌렸다. 오랜 운전으로 굳은 어깨의 긴장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도착한 별장은 다행히 실망할 구석 없이 근사했다.


 바다 가고 싶어. 그렇게 말한 건 열흘 전의 레인이었다. 이 집에서 생기는 돌발적인 행사는 주로 레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계기가 되었다. 폴과 클라리스는 어떤 이야기든 결국 진지하게 듣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거실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좁은 화면을 셋이서 들여다보게 되었다. 열흘만에 정말로 바다에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플로리다의 별장 테라스에 앉아있는 지금도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면서, 클라리스는 레인에게 받은 고기를 삼켰다. 두 사람은 바다 여행이 처음이라고 했다. 사람이 적은 해변에 가볼까 하다가도 유명한 곳을 고른 건 역시 처음인 만큼 실패가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여기 어때? 여기. 이름은 좀 별로지만. 레인이 가리킨 곳은 4.5개의 별이 반짝이는 플로리다의 해변이었다. 이름은 클리어워터 비치. 과연 지나치게 솔직한 이름이라고 클라리스도 생각했다. 그래도 이름의 투박한 인상을 덮기에 충분할 만큼 사진 속 하얀 모래사장과 투명하게 파란 하늘은 아름다웠다.

 "내일은 바다 갈 수 있겠지?”
 “그럼요…… 사실 오늘도 산책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예요.”
 “진짜? 그럼 다 먹고나서 보러 갈래.”

 마지막으로 구워진 고기와 야채를 차례차례 레인과 클라리스의 접시에 옮긴 폴이 마침내 집게를 내려놓았다. 그릴의 불이 꺼지자 난로가 꺼진 것처럼 생생한 추위가 잠시 세 사람을 쓸고 지나갔다. 그래도 가을 바람이니 참을만 했지만, 다들 아직 온기가 남은 접시 바닥을 손바닥 위에 두었다. 

 “무슨 얘기 중이었어요?
 “다 먹고 바다 가자!”
 “지금요? 내일 가는 줄 알았는데.”
 “내일도 가요. 오늘은 그냥 산책 겸이니까.”

 방한 점퍼를 입은 폴이 집게를 쥐고 있던 쪽 팔을 들어, 소매에 밴 탄 내를 맡았다. "셋이 가면 우리가 뭐 먹었는지 사람들이 다 알겠네요." 클라리스가 쓴 웃음을 지으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서늘한 바닷 바람이 고기 냄새를 지워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뭐 어때? 자랑하면 되는 거지." 아니면 우리 모두 레인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되거나.

 




*


 

 성수기를 비껴간 10월 중순, 공기는 맑았고 클리어워터 비치 역시 이름 그대로 깨끗한 바닷물을 자랑하고 있었다. ‘바다 앞 별장’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한 것이 무색하지 않게 별장 테라스에서 바다까지는 걸어서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별장은 해변의 끝자락에서 직선 거리에 위치했고, 가을 늦저녁의 바닷가 구석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바다 위로 덮여가는 석양은 여행지 소개 사이트의 축소된 사진보다 선명하고 진한 오렌지빛이었다. 

 "나 모래사장에서 맨발로 걸어보고 싶었어."

 운동화와 양말을 벗고 레인이 맨발로 하얀 모래 위를 걷기 시작했다. 소리는 작고 부드럽게 사락사락 울렸다. 클라리스는 모래 위의 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따라 걸었다. "……어때요? 부드러워요?" “엄청…….” 그렇다면 세 사람의 길고 긴 회의는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해변 가득 둥근 유리조각이 반짝인다는 캘리포니아의 글래스 비치는 일찌감치 후보에서 제외됐는데, 그 때도 레인은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레인을 따라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던 폴이 문득 모래 위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시선이 집중되자 폴이 머쓱하게 주운 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게 뭐야?" "1센트요." 그 후로는 한참, 그러니까 폴이 울컥할 만큼 오랫동안 레인이 웃는 소리가 계속됐다. 

 “행운의 사나이는 역시 다르네~”
 “그만 놀려요, 좀!”

 레인이 보란듯이 혀를 내밀었다. 부드러운 모래 위로 맨발이 남긴 발자국이 이어졌다. 운동화만큼 선명하게 남지 않은 뭉개진 발자국. 클라리스는 자국이 지워지지 않게 레인이 앞서 간 길에서 조금 옆을 걸었다. 넓고 물결 무늬가 남은 모래사장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사막처럼 느껴졌다. 운동화 끝으로 모래를 살짝 파올리듯이 차보면서 걸으니 걸음 속도가 느려졌다. 모래를 파헤친다고 동전이 굴러나오진 않았다. 역시 행운의 사나이만 할 수 있는 건가, 클라리스가 생각했지만 말로 하진 않았다. 슬슬 체념한 폴이 한숨을 내쉬고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던 참이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렌즈가 노을지는 바다를 향했다. 몇 번인가 필름을 새 것으로 바꾼 뒤라 사진을 찍는 포즈가 제법 그럴듯해져 있었다. 찰칵 소리는 사실 셔터를 누를 때 차르륵 하는 소리와 손가락을 뗄 때 캇, 하는 소리로 나뉜다는 것도 폴을 보는 사이에 새로 배우게 된 사실이었다. 셔텨를 누른 폴이 기계음과 함께 밀려나오는 사진을 기다렸다.

 

 "즉석 사진은 따뜻해야 잘 나온대요."

 "정말요? 오늘 추운데 아, 그럼 리스, 이거 잠깐만요."

 

 사진을 잠시 클라리스에게 넘긴 폴이 손을 모으고, 손바닥 안쪽으로 입김을 불더니 손바닥을 비볐다. 차가운 손이 충분히 따뜻해질 만큼 마찰열이 남은 후에 폴은 점퍼 안쪽 긴팔 옷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다시 클라리스에게서 받아든 사진이 소매와 따뜻한 양손으로 덮였다. 그 모습은 하나의 조심스러운 의식처럼 보였다. 덮었던 손을 치웠을 때, 사진은 폴라로이드 사진 특유의 빛바랜, 그러나 충분히 선명한 석양의 오렌지색과 바다의 민트색을 담고 있었다. 앞서 걷던 레인이 발걸음을 늦추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웃음기가 배어있지만 농담처럼 들리지는 않는 말투로, 잘 찍었네, 레인은 그렇게 말했다.


 "여기서도 카메라 살 수 있을까?
 "일회용 카메라 정도라면관광지니까 어디선가 팔고 있을 거예요. 가게는 다 닫았지만.”
 “사진 찍고 싶은 거면 카메라 빌려드릴 수 있는데…….”
 “으음~……. 아냐! 역시 내 걸로 찍을래.”
 “아, 돌아가는 길에 상점가 앞으로 돌아갈까요. 몇 시에 여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어느 샌가 해변에는 긴 발자국이 줄을 이룬 채 남아 있었다. 폴은 사진을 두 장 더 찍었고 세 장의 사진은 가방에 있던 미니 앨범 속에 안전히 보관되었다. 10월은 해가 빠르게 지기 시작하는 달이다. 슬슬 주변은 호박색 대신 어두운 남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돌아갈까요, 누군가는 그렇게 말해야 했고 세 사람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

 

 모래사장은 해변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 후에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사박거리는 발소리도 셋이나 모이면 제법 크게 들렸다. 상점가에 가려면 해변을 나와 한 번 차도를 건너야 했다. 모래사장이 끝나는 경계선 앞에서 레인이 우뚝 멈춰섰다. 

 "양말 못 신겠어…… 폴! 나 좀 업어 봐." 
 "아까 그렇게 놀려 놓고 이럴 때만……. 털고 신으면 안돼요?" 
 "까끌까끌해서 기분 나쁠 것 같단 말이야……. 그럼 클라리스가 업어 줘." 
 "제가 업으면 떨어뜨릴 것 같은데……." 
 “…….”
 “…….”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아, 그럼 카메라는 제가 들게요…….”

 툴툴거리면서도 폴이 자세를 낮추자 레인이 기다렸다는 듯 등에 업혔다. 레인이 한 손에 모아 든 운동화에서 하얀 모래가 떨어졌다. 클라리스가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받아들었고, 렌즈를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다가 그대로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가 사진을 뱉어내는 동안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을 감추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결국 클라리스가 웃었다.

 

 "둘이 사이 좋아보여서요."
 "아니."

 거든요, 라고 말을 끝맺지는 못하고 폴이 입을 다물었다. "우리 사이가 좀 좋지~"하고 레인이 폴의 목을 끌어안는 시늉했을 때는 말을 멈춘 걸 후회하는 눈치였지만. 차도를 건너느라 혼란은 어쩔 수 없이 잦아들었다. 어느 샌가 인화가 끝난 사진을 클라리스가 내려다보았다. 바다와 저무는 해를 등진 두 사람의 사진은 조금 어둡고 흔들려서 빈 말로도 잘 찍었다고 하기엔 어려웠다. 그래도 클라리스에게는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이 사진은 달라고 해야지, 옆 사람의 그런 생각과 무관하게 폴이 다시 말을 꺼냈다. "어쨌든,"

 

 "그렇게 말할 거면 셋이라고 해야죠. 리스도 같이 다시 찍어요."

 "아, 그럼 그건 내가 찍을래! 빨리 와 봐, 클라리스." 

 

 카메라가 레인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리기도 전에 레인은 카메라를 든 팔을 최대한 뻗었다. "앗, 잠깐…." "찍는다? …하나!" 둘과 셋 없이 셔터 소리가 울렸다. 벙찐 두 사람에게는 무자비하게도 카메라는 공평하게 작동했다. 사진을 뱉어내는 모습이 조금 얄밉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지른 일이 있는 만큼 할 말이 없는 클라리스는 체념의 표정을 지었고, 두 번이나 무고하게 당한 폴만 "치사하잖아요!"하고 항의했다. 둘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레인은 시선을 피해 인화되어 가는 사진을 확인했다. 그리고 씩 웃더니 사진을 그대로 겉옷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괜찮아, 잘 나왔으니까."
 "절대 안 믿어요…."

 

 어찌 됐든 찍힌 사진은 되돌릴 방법이 없으니까. 세 사람은 걸었고, 문 닫은 가게의 어두운 쇼 윈도 위에 셋의 모습이 비쳤다가 다음 가게의 유리 위로 옮겨가기를 반복했다. 사람이 끊이지 않는 관광지의 여유인지 대부분의 가게는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연다고 되어 있었다. 어느 샌가 화제는 다음으로 넘어가 돌아가면 잘 때까지 카드 게임을 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일은 늦잠을 자게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늦게 열어서 다행일지도 몰라, 11:00이라는 하얀 글씨들을 보면서 클라리스가 생각했다.

 

 

 

 

Posted b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