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2020. 3. 5. 15:40 from 카테고리 없음

 

 

 

 

 "잠이 안 와요~ 우리 춤추면 안돼요?” 
 “여기서 추면 배가 뒤집어질 테니까 참아 줘, 카시."

 "…."

 "이야기라도 할까?" 

 "음.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왕자님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죠!" 
 "내가 하는 거야? 자, 잠깐 생각 좀 해보고."

 

 접어둔 닻의 끝자락이 잔잔한 바람에 간간이 팔락였다. 두 사람은 천 두 장을 하나는 나무 위에 깔고, 하나는 나눠 덮은 채 좁은 배 안에 누워 있었다. 물고기 한 마리 보이지 않는 물 위에선   노를 놓고 쉴 때마다 카시는 살아있는 생물이 없나 물 너머를 들여다봤고, 모모는 카시가 빠질까 봐 그 뒷모습을 꾸준히 감시해야 했다   바람에 수면이 찰박이며 만드는 심심한 리듬밖에 들리지 않았다. 고요하고 이상한 기분이 드는 밤. 바다 위에서의 첫 밤이었다. 

 

 피아칸트를 벗어나 록차를 타고, 걷고, 리탄트의 끝에 다다랐을 때 마침내 두 사람은 진짜 바다를 눈 앞에 두었다. 긴 여정이었다. 왕자와 귀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덧대어 입었던 천은 유용한 자금으로 변했다. 얇고 손에 부드럽게 감기는 천을 내밀고 풀 껍질에서 뽑은 실로 짠 빳빳한 천을 사들였을 때, 상인의 표정 아래로 흐르던 당혹을 두 사람은 가끔 유쾌한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어쨌든 그녀는 수완이 좋은 상인이었다. 몇 가지 장신구를 더 팔았을 때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는지 가죽 수통과 식탁에 오르는 것보다 한참 질기고 단단해보이는 빵을 보여주었다. 품이 안좋은 것이 아니라 잘 상하지 않게 구웠다는 설명을 덧붙여가며 말이다. 둘은 권유받은 대로 수통과 빵, 거기에 더해 말린 고기와 열매를 샀다. 짐은 토록 가죽으로 만든 가방 두 개에 전부 들어갔다. 나머지 돈은 배를 사는데 써야 했다.

 

 배. 그렇다. 우리는 정말로 배에 올라타게 되는 것이다. 옥상에 나란히 서서 왕성을 둘러싼 호수를 내려다보며 더 넓은 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가. 선금을 받은 상인이 배를 정비하는 며칠 동안 모모와 카시는 자주 바닷가로 향했다. 해가 달이 되고 밤이 찾아오면, 부드러운 모래 위를 덮었다가 밀려나는 물을 오래 바라보았다. 카시는 자주 물에 손이나 발을 담갔고, 어느 날에는 양손으로 물을 떠올려 그것을 마셨다. 그리고 마물의 물이 몸 안에 돌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없이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모모는 가뭄 때 바닷물을 길어오는 사람들의 기록을 알았기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무 맛도 안 나네요!' 마침내 카시가 그렇게 말했다. 시시한 진실은 항해의 보탬이 될 단서로 두 사람의 머리 한구석에 남았다.

 

 "…그러니까 구멍이 보인다면 땅여우가 있을지도 몰라. 열매 한 두 개 정도 던져줄 여유가 있을 때 도착하면 좋은데."

 "친해진다면 한 마리 데려가고 싶네요! 개 대신에 키우는 거죠."

 "개는 키워본 적 있어?"

 "아뇨, 모모는?"
 "나도. 왕성에서 기르는 경비견이라도 한번쯤 만져보고 싶었는데 허락을 못 받아서. 아."

 "음…?"

 "카시, 지금 하나도 안 졸리지."

 "아~… 먼저 말해버렸네요!"

 

 이러다 밤을 새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에 모모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잠이 안 오게 하는 요인은 한 손을 다 접고도 남을 만큼 있었다. 잊을 수 없는 낮이 지나간 후에 잠들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노 젓기는 검술과는 다른 노동이라 몸 곳곳이 욱신거렸다. 그리고 밤, 물 위. 비 오는 날이 아니면 리탄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던 추위는 이곳 이 시간에 모여 있었다. 모모가 천을 조금 끌어올렸다. 

 

 “꽤…… 춥네. 그래서 잠이 잘 안 오는 걸지도. 천을 한 장 더 사둘걸.” 
 “우리 왕자님, 바다랑 체질이 안 맞는 모양이네…… 내 옷이라도 벗어줄까요?” 
 “아니, 아니괜찮아. ……또 놀리고 있는 거지?”


 대답 대신 히죽 웃은 카시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불길한 예감이 들 때까지 빤히 얼굴을 내려다보던 카시가 양손으로 모모의 푹신한 옆머리를 누르더니, 손가락을 머리카락 사이에 넣어 헝클어뜨렸다. "정답이에요!" "우왓. 맞췄으면 상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게 상인 거죠~ 싫어요?" "글쎄, 일단 내일 일어나면 머리가 볼만하겠네." "그래도 참아요! 여우를 만지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손이 심심해졌거든요." "봐, 상이랑 관계 없잖아."

 

 한참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으며 놀던 카시의 손이 마침내 멈췄다. 멈췄지만 떨어지지 않고, 부드러운 이마를 건드린다. 가지런하게 닿은 네 손가락이 앞머리를 쓸어 옆으로 넘겼다. 뒤늦게 닿은 엄지가 이마를 문질렀다. 그대로 엄지로 이마를 꾹 누르고 있자 모모가 뭘 하냐는 듯이 웃었다.

 “선정인이라도 만들어주려고?”

 이번에는 카시가 웃었다. 살짝 힘주어 대고 있던 엄지가 옆으로 밀려나듯 미끄러졌다.

 “카시가 만약 아네키우스 님이라도 지금은 안돼요! 왕자님 이마에 인이 생겨버리면 뱃머리를 돌려야 할 테니까.”

 모모가 자기 이마를 한 번 만져보다가 천 위로 팔을 내렸다. 작은 배는 이미 바다 한복판에 있고 눈 앞에 있는 여자가 아네키우스의 화신일 리도 없다. 선정인, 신이 내린 관. 태어난 순간에 결론이 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이마에 머물렀다가 모른 척 떨어지는 시선은 때때로 그들 눈에 선정인과는 다른 낙인이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가능성이 있었으나 선택받지 못한 몸. 왕자의 깨끗한 이마는 신의 손이 닿지 않은 이마다. 모모가 한 번 숨을 들이켰다. 물기 어린 공기가 가슴 속에 시원한 감각을 남겼다. 왕성의 공기는 언제나 긴장을 머금고 떠도는 소문을 실어날랐다. 소문에 마음 안쪽이 닳아 날카로워지는 걸 견딜 수 없게 된 사람들은 하나 둘 왕성을 떠났다. 모모는 오래 남아있던 편이다. 태어나 성인이 되고 앉을 수 없는 왕좌 앞에 두 총애자가 불려오기 직전까지 견뎠으니까. 곧 칩거가 끝나고 새 왕이 왕좌에 앉는다. 누구도 짐작 못 할 신의 의지로 두 번째 총애자가 세상에 태어난 지 15년, 사람들은 신의 의도를 해석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리라.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먼 일처럼 느껴지는 그 성을 떠올릴 때 모모는 자주 두 어린 총애자를 떠올렸고,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 역시 함께 떠올렸다. 


 “생겨도 이제 와서 돌아가진 않을 거야.”
 “정말로?”
 “그야, 선정인이 없어도 돌아가면 난리가 날 텐데. 없던 인까지 생겨서 오면… 상상하기 무섭지 않아?" 
 “그건 그래요…! 내가 갇힌 방에 모모가 또 갇힐 수도 있겠고.”

 카시가 키득키득 웃었다. "다행이네…." 짧은 말 뒤에는 설명이 붙지 않았다. 모모가 떠나지 않아서, 이 배 위에 혼자 남겨질 일이 없어서, 내가 신관이 되지 않고 당신이 왕이 되지 않아서, 아니, 처음부터 우리 둘 다 될 수 없어서. 모모는 대답하지 않고 하늘에 고정된 녹색 달을 보았다. 두 사람 각각의 마음 속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조립된 배가 정박되어 있었다. 배를 땅에 묶어둔 밧줄은 공통적으로 한 문장이었다. 떠나면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나고 자란 땅,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곳에.

 

 나뭇잎 색 빛이 모모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카시는 감기지 않은 모모의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녹의 달은 카시가 가장 미워하는 달이다. 그래서 그는 녹의 달에 하늘을 보지 않는다. 아이가 성인이 되고 자라난 몸이 빛 아래에 드러나면 신에게 인정받은 것을 축하하는 작은 축제가 열렸다. 잠이 깬 카시는 바닷물로 뜨거운 몸을 씻고 싶었으나 바다는 멀리 있었다. 전부 옛날 일이다. 다시 몸을 눕힌 카시가 모모의 옆얼굴을 보았다. 달빛에 드러난 그의 깨끗한 이마를. 어린 시절 캐시아를 신관으로 키우고 싶었던 남작은 잠 못 드는 밤마다 성서를 읽어주었다. 캐시아는 잠든 척 눈을 감고 있다가, 어머니가 방을 나가면 눈을 뜨고 창문 너머로 빛나는 달을 보았다. 신은….

 

 “신은 우리의 머리 위에 계시며, 그 얼굴을 항상 우리에게 향하고 계시니.”

 모모의 시선이 달을 떠나 카시를 향하면 장난스러운 웃음이 그를 마주했다. 카시가 두 사람의 몸을 덮고 있던 커다란 천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두 사람의 머리를 천으로 완전히 덮었다. 빳빳하고 촘촘하게 짜인 천은 희미한 달빛을 통과시키지 않는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완전한 어둠이었다. '의심하지 말지어다, 나의 백성아. 어느 때에도 곁을 거니는 그 마음을. 한탄하지 말지어다, 나의 백성아. 그 분의 손은 눈물 젖은 뺨을 매만지시니.' 카시의 목소리가 그의 기억 속 어머니의 목소리와 겹쳐진다. 어둠 속에 울리는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섞여있다. 

 “보라 그 모습을, 그 힘을. 빛 닿는 곳에 반드시 그 분의 자비가 있으리.”

 

 빛 닿는 곳은 어디나 신의 은혜로 가득 차 있으니, 빛이 닿지 않는 곳이야말로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고.

 선택받지 못한 왕자가 신을 모욕한 죄인을 데리고 도망쳤던 날에, 천이 드리운 그림자에 얼굴을 숨기고 끝없이 말을 흘리던 입술을 다물었을 때. 카시는 자신의 앞을 걷는 남자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얇은 어둠에 태양이 틈 없이 가려진 날에는 신의 귀를 피해 인간끼리 비밀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던 것이다. 사실은 바다의 건너편이 궁금하지 않았어요. 당신과 같은 배를 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 배를 띄우고 싶었으니까. 저 저주스러운 태양빛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아요! 하지만 그런 곳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죠. 봐요, 모모. 당신은 날 구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러나 돌아본 모모와 눈이 마주친 순간 카시는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천으로 만든 어둠 속에서 카시가 묻는다.
 “아무 데도 도착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래요?”
 “그때는….” 
 모모는 살아있다면, 같은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는 사람이고,
 “또 다른 곳으로 가봐야지.”

 ‘바다로 갈 거야, 카시.’ 이것은 죽기 위한 여정이 될 수 없다. 이 손에 붙잡힌 이상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삶에서 가장 먼 곳, 모두가 그 끝에 죽음만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곳을 향해 가면서도.

 

 그리고 두 사람은 바다에 도착했다. 바다는 여전히 고요하고, 아직 잠들지 않는 두 사람의 목소리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다.

 

 “벽을 넘어보는 건 어때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것도 괜찮지. 그보다 카시… 슬슬 답답하지 않아?"

 "하~나도! 안 춥고 좋잖아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모모의 표정이 보고 싶어졌지만 카시는 천을 내리지 않았다. 모모 역시 카시의 변덕에 어울려주려는 듯 한동안 어둠 속에 가만히 숨을 죽였다. 리탄트보다 더운 공기에 숨이 답답해질 때까지. 떠나왔으니 돌아갈 수 없다. 이제 닻이 된 문장이 둘을 먼 바다로 떠밀었다. 찰박, 찰박, 일정한 리듬으로 물이 배에 부딪히는 소리. 작은 배는 록차처럼, 또는 요람처럼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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